영생
Eternal life
영생은 끝없이 오래 사는 것만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을 알고 그분과 사귀는 생명, 곧 아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믿는 이는 이 생명을 지금 이미 받아 누리며, 부활 때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온전히 누립니다.
하나님을 아는 생명
신약에서 ‘영생’은 조에(ζωή), 곧 생명과 아이오니오스(αἰώνιος), 곧 영원한이라는 말이 합쳐진 것입니다. 아이오니오스는 ‘시대’라는 말에서 왔으므로, 영생은 끝없는 시간일 뿐 아니라 오는 시대의 생명이기도 합니다. 그 생명이 어떤 것인지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영생은 이것이니 곧 그들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인 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 17:3
웨슬리는 이 ‘앎’을 "사랑이 있는 거룩한 믿음으로 아는 것입니다"라고 풀고, 이것이 "영원한 행복에 이르는 길이자 그 본질입니다"라고 덧붙입니다 웨슬리.
영생은 죽은 뒤에야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믿는 자가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자는 영존하는 생명이 있고 또 정죄에 이르지 아니하리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요 5:24). 요한은 "또 그 증언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분의 아들 안에 있다는 것이니라."고 하고 (요일 5:11), 바울은 영생을 우리가 번 삯이 아니라 "죄의 삯은 사망이나 하나님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해 얻는 영원한 생명이니라."라고 부릅니다 (롬 6:23). 그러면서도 영생은 아직 바라는 소망입니다 (딛 1:2).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우리가 지금은 거울을 통하여 희미하게 보나 그때에는 얼굴을 마주 대하여 보며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시는 것 같이 나도 알리라." (고전 13:12),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의 종들은 "그분의 얼굴을 볼 것이요 그분의 이름이 그들의 이마 안에 있으리라." 것입니다 (계 22:4).
교회가 고백해 온 것
사도신경은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다는 고백으로 끝나고 사도신경,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문.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영생의 조항에서 얻는 위로를 이렇게 답합니다.
내가 지금 마음속에 영원한 기쁨의 시작을 느끼고 있으므로, 이생이 끝난 뒤에는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한 완전한 복락을 누리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을 영원히 찬양하리라는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58문
전통들이 그리는 모습
전통마다 이 생명의 완성을 그리는 말이 다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를 따르는 가톨릭 신학은 사람의 마지막 행복을 하나님을 직접 뵙는 ‘지복직관’으로 설명하고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정교회는 우리가 "그것들로 말미암아 지극히 크고 보배로운 약속들이 우리에게 주어졌나니 이것은 너희가 이 약속들을 힘입어 정욕으로 인해 세상에 있게 된 썩을 것을 피하여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니라."가 된다는 말씀 (벧후 1:4)을 따라 하나님과의 연합, 곧 ‘테오시스’(神化)를 말합니다. 개신교회는 흔히 영화와 하나님을 영원히 즐거워함이라는 말로 고백합니다.
복음주의 안에서는 영생을 받은 이가 그것을 잃을 수 있느냐를 두고 견해가 갈립니다. 개혁파는 "내가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노니 그들이 결코 멸망하지 않을 것이요 또 아무도 내 손에서 그들을 빼앗지 못하리라."라는 말씀 (요 10:28)을 따라 성도의 견인을 고백하고, 웨슬리 전통과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이 생명이 아들 안에 있으므로 믿음으로 그분 안에 머물러야 하며, 믿음을 저버리면 잃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 주제는 영생이란 무엇인가?와 교리 과정의 부활, 심판, 새 하늘과 새 땅 과에서 더 다룹니다.
출처
-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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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