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영생이란 무엇인가?

짧은 답

성경이 말하는 영생은 끝없이 이어지는 시간만이 아니라, 참 하나님과 그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생명입니다. 이 생명은 믿는 사람에게 지금 시작되고, 몸의 부활과 새 창조 안에서 완성됩니다. 그것은 얻어 내는 보상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받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성경의 답

‘영생’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이 죽지 않고 끝없이 사는 것을 떠올립니다. 성경도 죽음이 사라지는 때를 약속하니 틀린 생각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이 영생을 정의하는 가장 직접적인 말씀은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관계를 가리킵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앞두고 아버지께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영생은 이것이니 곧 그들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인 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 17:3

여기서 ‘안다’는 것은 정보를 가지는 일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안다는 것은 사람이 사람을 알듯 서로를 알고 사귀는 일입니다. 영생은 먼저 하나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이고, 그 관계는 시간이 흘러도 끝나지 않는다는 뜻에서 ‘영원’합니다.

이 생명은 선물로 주어집니다. 요한복음 3:16(요 3:16)은 하나님이 독생자를 주신 목적이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울도 "죄의 삯은 사망이나 하나님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해 얻는 영원한 생명이니라."고 씁니다 (롬 6:23). 영생은 선행의 대가로 받는 월급이 아니라 은사입니다.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신약이 영생을 먼 미래의 일로만 말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자는 영존하는 생명이 있고 또 정죄에 이르지 아니하리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느니라.

요 5:24

"영생을 얻었고"는 헬라어로 지금 ‘가지고 있다’는 현재형이고, "옮겼느니라"는 이미 일어난 일을 말합니다. 믿는 사람은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는 것입니다. 요한일서도 같은 확신을 줍니다.

또 그 증언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분의 아들 안에 있다는 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들을 쓴 것은 너희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하고 또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라.

요일 5:11-13

그래서 영생은 ‘죽은 뒤에 받을 것’이기에 앞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께서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신 것도 그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요 10:10). 그분이 주시는 생명은 죽은 뒤에야 켜지는 불이 아니라, 지금 이 삶을 채우는 생명입니다.

그러나 이 생명은 지금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믿는 사람도 여전히 병들고 늙고 죽습니다. 요한은 "사랑하는 자들아,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니라.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되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분과 같게 될 줄 아노니 이는 우리가 그분을 그분께서 계신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라."라고 인정합니다 (요일 3:2). 그러나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때 우리가 그분과 같아질 것을 안다고도 말합니다. 영생의 완성은 부활에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그리스도께서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사 잠든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가 되셨다고 말하고 (고전 15:20), 마지막 나팔 소리에 죽은 자들이 썩지 않을 것으로 살아나리라고 합니다 (고전 15:51-52). 성경의 마지막 장면은 영혼이 몸에서 벗어나 어딘가로 사라지는 그림이 아닙니다. 하늘과 땅이 새로워지고, 하나님이 사람들 가운데 거하시는 그림입니다.

내가 하늘에서 나는 큰 음성을 들으니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성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고 그분께서 그들과 함께 거하시리라. 그들은 그분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께서는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시리라.

계 21:3

그곳에는 "또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시리라. 다시는 사망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없으며 또 아픔도 다시는 없으리니 이는 이전 것들이 지나갔기 때문이라, 하더라." 처음 것들이 지나갔다고 합니다 (계 21:4). 생명나무가 있고, 그분의 종들은 "그분의 얼굴을 볼 것이요 그분의 이름이 그들의 이마 안에 있으리라."라고 합니다 (계 22:4). 정리하면 영생은 하나님을 아는 생명이며, 지금 시작되어 새 창조의 몸으로 완성됩니다.

교회의 증언

초대 교회는 이 소망을 신앙고백의 마지막 줄에 놓았습니다. 사도신경은 몸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믿는다는 고백으로 끝나고 사도신경, 니케아 신경은 죽은 자의 부활과 오는 세상의 생명을 기다린다고 고백합니다 니케아 신경. 교회가 영생을 말하면서 반드시 몸의 부활을 함께 말한 까닭은, 구원이 사람의 일부가 아니라 전체를 향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요한복음 17:3을 풀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라면, 이 지식에서 우리가 나아갈수록 영생에서도 나아가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곳에서 그는 하나님이 모세에게 하신 말씀, 곧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말씀을 "우리는 영생 가운데서 바라볼 것입니다"라고 씁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영생은 하나님에 대한 앎이 깊어지는 일이고, 그 앎에는 끝이 없다는 이해입니다. 요한복음 5:24에 대해서도 그는 현재의 삶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이 생명은 생명이라는 이름을 받을 만하지 못하며, 영원한 생명만이 참된 생명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이 땅의 삶이 무가치하다는 말이 아니라, 죽음이 끝내 삼키는 생명은 참 생명의 그림자라는 뜻입니다.

매튜 헨리는 로마서 6:23에서 영생이 누구에게서 오는지를 분명히 합니다. "하나님의 은사는 영생입니다. 그리고 이 선물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습니다" 매튜 헨리. 이어서 그는 그리스도께서 영생을 사셨고 예비하셨고 우리가 그것을 받도록 준비시키시며 끝까지 지키신다고 풀이합니다 매튜 헨리.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도 사람의 첫째 되는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문. 영생의 중심에 있는 것이 하나님 자신이라는 점에서 이 고백은 요한복음 17:3과 같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영생의 장소와 모습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강조점의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구원받은 이들이 가는 곳을 주로 ‘하늘’로 말하고, 어떤 이들은 요한계시록 21장을 따라 하늘과 땅이 새로워져 하나님이 새 땅에서 사람들과 함께 사시는 모습을 강조합니다. 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고백하는 것은 같습니다. 영생은 그리스도와 함께, 몸을 입은 채, 죽음이 없는 곳에서 하나님을 뵈며 사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죽음과 부활 사이의 상태에 대해서는 죽음 뒤에는 무엇이 있는가?에서 다룹니다.

원어로 보기

신약에서 ‘생명’은 대개 조에(ζωή)입니다. 이 말은 숨 쉬고 있는 생물학적 생명도 가리키지만, 요한복음에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생명이라는 더 깊은 뜻으로 자주 쓰입니다. 예수께서 "더 풍성히" 주시겠다고 하신 것이 이 생명입니다.

‘영원한’으로 옮겨진 아이오니오스(αἰώνιος)는 ‘시대, 세대’를 뜻하는 아이온(αἰών)에서 나온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역사를 ‘이 시대’와 ‘오는 시대’로 나누어 생각했고, 많은 학자는 아이오니오스 생명을 일차적으로 ‘오는 시대의 생명’으로 이해합니다. 이 말이 본질적으로 질적인 의미인지, 아니면 끝이 없다는 양적인 의미인지에 대해 학자들 사이에 강조점이 다릅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의 문맥은 두 가지를 다 보여 줍니다. 마지막 시대의 생명이므로 질이 다르고, 죽음이 더는 없으므로 끝이 없습니다.

기노스코(γινώσκω)는 ‘알다’입니다. 히브리어 ‘야다’가 그렇듯 헬라어 성경에서도 이 말은 머리로 아는 것을 넘어 인격적으로 사귀어 아는 것을 담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7:3의 "아는 것"이 이 단어입니다. 영생을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정의한 말씀은, 영생의 핵심이 장소나 조건보다 사귐에 있음을 말해 줍니다.

흔한 반론과 답

"끝없이 사는 것은 지루하거나 오히려 무서운 일이 아닌가?" 이 반론은 가볍지 않습니다. 일부 철학자들은 무한히 계속되는 삶은 결국 의미를 잃고 권태에 이를 것이라고 논증했습니다. 우리가 아는 시간의 연장, 곧 지금의 삶을 영원히 반복하는 것을 영생으로 생각한다면 그런 두려움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영생은 현재의 삶을 한없이 늘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무한히 선하신 분을 아는 일이며, 그 앎에는 끝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했듯 하나님을 아는 일에서는 나아갈수록 더 나아갈 곳이 열립니다. 게다가 성경은 그곳을 아무 일도 없는 정적의 상태로 그리지 않고 잔치, 예배, 다스림, 만물이 새롭게 되는 일로 그립니다 (계 21:5). 다만 그 삶이 실제로 어떤 모습일지 우리가 다 알지 못한다는 점은 정직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영생은 현실의 고통을 외면하게 하는 위안, 곧 ‘하늘의 파이’가 아닌가?" 종교가 죽음 뒤의 보상을 앞세워 이 세상의 불의를 참게 하는 데 쓰인 적이 있다는 비판은 사실이며, 교회가 겸손히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약속하는 영생은 이 세상을 버리는 도피가 아니라 이 세상이 새로워지는 소망입니다. 영생이 이미 시작되었다면 그리스도인은 지금 여기서 하나님을 알고 이웃을 사랑하도록 부름받습니다. 예수께서 병자를 고치시고 굶주린 자를 먹이신 것도 지금의 삶을 가볍게 보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영생에 대한 소망이 위로가 된다는 것과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이며, 이 소망이 사실이라는 근거는 위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예수는 정말 부활했는가?를 보십시오.

"영생이 이미 시작되었다면 왜 믿는 사람도 여전히 죽고 고통받는가?" 성경은 이 긴장을 숨기지 않습니다. 바울은 성령의 첫 열매를 받은 우리도 "속으로 탄식하여" 몸의 구속을 기다린다고 합니다 (롬 8:23). 영생은 이미 주어졌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씨앗이 이미 땅에 심겨 자라기 시작했으나 추수는 아직 오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이 사이에 있는 고통을 하나님이 어떻게 쓰시는지는 고난에도 의미가 있는가?에서 다룹니다. 여기서는 성경이 고통을 부정하지 않고, 그 고통이 마지막이 아니라고 약속한다는 점만 말하겠습니다.

더 생각해 보기

영생에 대한 질문은 결국 ‘나는 누구를 알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돌아옵니다. 요한복음 17:3에 따르면 영생은 어떤 교리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한 분을 아는 것입니다. 그분은 지금도 알려지기를 원하십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내가 ‘영생’이라는 말에서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시간의 길이입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입니까? 영생이 이미 시작되었다면 오늘 나의 하루에서 무엇이 달라질 수 있을까요? 하나님을 ‘안다’는 말을 나는 어떤 의미로 쓰고 있습니까?

더 읽으려면 죽음 뒤에는 무엇이 있는가?, 천국과 지옥은 실재하는가?, 구원이란 무엇인가?를 보십시오. 요한복음 17장과 요한계시록 21-22장을 이어서 읽어 보는 것도 좋습니다.

출처

  1. 고대 교회, 사도신경 — 로마 교회의 세례 신앙고백에서 자란 서방 교회의 기본 신조. 읽기
  2. 니케아·콘스탄티노플 공의회, 니케아 신경 325/381 — 동서방 교회가 함께 고백하는 신조. 읽기
  3. 웨스트민스터 총회,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647 —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요리문답(107문). 제1문: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인가. 하나님과 창조, 구원, 십계명, 성례와 기도를 가르친다. 읽기

성경과 고전 주석을 바탕으로, 역사적 기독교 신앙(사도신경, 니케아 신경)의 관점에서 쓴 글입니다. 그리스도인 사이에 견해가 갈리는 문제는 여러 견해를 함께 소개합니다. 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