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천국에서 서로 알아볼 수 있는가?

짧은 답

성경은 부활한 사람이 이 땅의 삶과 이어진 자기 자신으로 다시 살아난다고 가르치므로, 서로를 알아볼 것이라는 소망에는 든든한 근거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모습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으며, 알지 못하는 부분은 정직하게 열어 두어야 합니다. 모든 관계는 주와 함께 있음 안에서 완성됩니다.

성경의 답

이 질문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들이 가장 간절하게 묻습니다. 성경이 약속하는 부활은 낯선 존재로 다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삶의 자기 자신이 변화되어 살아나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놀라 두려워하는 제자들에게 보이신 모습이 그 첫 증거입니다.

내 손과 내 발을 보라. 바로 나니라. 나를 만지고 또 보아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가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하시니라.

눅 24:39

예수께서는 "나인 줄 알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 앞에서 구운 생선을 잡수셨습니다 (눅 24:42-43). 부활하신 분은 같은 분이었고, 제자들도 그분을 알아보았습니다. 바울은 우리의 부활을 이 첫 열매와 연결하며, 이 몸이 씨앗처럼 심겨 새로운 몸으로 다시 산다고 말합니다.

죽은 자들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라. 그것은 썩는 것 가운데 뿌려지고 썩지 않는 것 가운데 일으켜지며 수치 가운데 뿌려지고 영광 가운데 일으켜지며 연약함 가운데 뿌려지고 권능 가운데 일으켜지며 본성에 속한 몸으로 뿌려지고 영에 속한 몸으로 일으켜지나니 본성에 속한 몸이 있고 영에 속한 몸이 있느니라.

고전 15:42-44

심는 것과 거두는 것은 같은 씨앗에서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몸은 이 몸과 단절된 다른 사람이 아니라 이 몸이 변화된 것입니다. 이 연속성이 서로를 알아보리라는 소망의 첫째 근거입니다.

둘째로, 성경에는 이미 하늘의 사람들이 알려진 사람으로 나타나는 장면이 있습니다. 변화산에서 제자들은 예수와 함께 말씀하는 모세와 엘리야를 보았고, 베드로는 곧바로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초막을 짓겠다고 말했습니다 (마 17:3-4). 성경은 제자들이 어떻게 그들을 알아보았는지는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들은 이름을 가진 사람으로 서로 알려져 있습니다. 셋째로, 예수께서는 하늘나라를 많은 사람이 동서에서 이르러 "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와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하늘의 왕국에서 앉으려니와" 앉는 잔치로 그리셨습니다 (마 8:11).

다만 성경은 재회에 대해 불필요한 확신도 주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사람들이 즉시 알아본 것은 아닙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그들은 눈이 가려져서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더라."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눅 24:16), 떡을 떼실 때에야 "그들의 눈이 열려 그들이 그분을 알아보았으나 그분께서는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셨더라."라고 합니다 (눅 24:31). 막달라 마리아도 동산에서 그분을 동산지기로 알았다가 이름이 불릴 때 돌이켜 "랍오니여"라고 했습니다 (요 20:15-16). 알아봄은 있었지만 눈이 열리고 이름이 불릴 때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죽은 사람들 때문에 슬퍼했을 때, 바울의 위로는 이러했습니다.

그 뒤에 살아서 남아 있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들 속으로 채여 올라가 공중에서 주를 만나리라.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살전 4:17

그러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들로 서로 위로하라." (살전 4:18). 바울은 죽은 이들과 산 이들이 함께 주를 맞이한다고 말하고, 그것을 위로로 주었습니다. 재회의 소망이 성경이 허락하는 소망임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그 중심은 "주와 함께"입니다. 그리고 앎에 대해 바울은 이렇게 씁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을 통하여 희미하게 보나 그때에는 얼굴을 마주 대하여 보며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시는 것 같이 나도 알리라.

고전 13:12

장차 우리는 지금보다 덜 알지 않고 더 온전히 알게 됩니다. 이 약속은 사람과 사람의 앎에도 해당한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교회의 증언

교회는 사도신경에서 "몸의 부활"과 함께 "성도의 교제"를 고백해 왔습니다 사도신경. 성도의 교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죽은 사람들과도 이어지는 하나의 교회에 대한 고백으로 이해되어 왔으나, 그 방식은 전통마다 다릅니다. 가톨릭과 정교회는 하늘의 성도들이 우리를 위해 기도하며 우리가 그들에게 기도를 청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대부분의 개신교회는 그런 간구를 성경에서 찾을 수 없다고 보아 따르지 않으면서도, 같은 그리스도 안에 하나로 묶여 있다는 점은 고백합니다.

매튜 헨리는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서 위로를 이렇게 정리합니다. "모든 성도가 만나 영원히 함께 있게 되리라는 것도 얼마간 행복이지만, 천국의 으뜸가는 행복은 주와 함께 있고 그분을 뵈며 그분과 함께 살고 영원히 그분을 누리는 것입니다" 매튜 헨리. 그는 또한 친구들의 죽음에 대한 슬픔이 정당하며 "그리스도교는 우리의 자연스러운 애정을 금하지 않으며 은혜가 그것을 없애지 않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매튜 헨리. 고린도전서 13장을 풀며 그는 이렇게 씁니다.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을 완전하게 사랑할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우리는 서로를 완전하게 사랑할 것입니다" 매튜 헨리.

예수께서 부활 때에는 장가도 시집도 가지 않고 "부활 때에는 그들이 장가가지도 시집가지도 아니하며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천사들과 같으니라."고 하셨을 때 (마 22:30), 옛 교부들은 이것을 사랑이 줄어든다는 뜻으로 읽지 않았습니다. 히에로니무스는 이 말씀을 "우리가 하늘에서 누릴 삶이 영적일 것이라는 확증"이라고 풀이합니다 히에로니무스. 위(僞)크리소스토무스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 세상에서는 우리가 죽기 위하여 태어나고, 죽음이 삼키는 것을 출산이 채우게 하려고 혼인합니다. 그러므로 죽음의 법이 제거되는 곳에서는 출산의 이유도 함께 제거됩니다" 위(僞)크리소스토무스. 혼인이라는 제도는 죽음이 있는 세상의 질서였다는 설명입니다. 서로에 대한 사랑이나 앎이 사라지는지는 이 설명이 답하지 않으며, 성경도 더 말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열려 있는 질문이 있습니다. 부활 후에 우리가 이 땅의 삶을 어디까지 기억하는지, 특히 슬픔과 상실의 기억이 어떻게 되는지, 그리고 지상의 부부와 가족의 관계가 어떤 모습으로 이어지는지에 대해 성경은 분명히 말하지 않습니다. 이사야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보라, 내가 새 하늘들과 새 땅을 창조하노라. 이전 것은 기억나지 아니하며 생각나지 아니하리라."고 말하는데 (사 65:17), 이것이 모든 기억의 소멸을 뜻하는지, 슬픔이 더는 우리를 짓누르지 않는다는 뜻인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이 점들은 열어 두고 하나님의 선하심에 맡기는 것이 정직한 태도입니다.

원어로 보기

앞에서 본 두 구절, 곧 엠마오 제자들이 "알아보더니"와 바울이 "온전히 알리라"고 한 말에는 같은 동사 에피기노스코(ἐπιγινώσκω)가 쓰였습니다. 이 말은 ‘알다’를 뜻하는 기노스코에 접두어가 붙은 형태로, ‘알아보다, 분명히 알게 되다’의 뜻으로 쓰입니다. 접두어가 의미를 얼마나 강화하는지는 학자들 사이에 다르게 보지만, 두 구절 모두 가려졌던 것이 드러나는 앎을 말한다는 점은 같습니다. 바울의 말에는 "내가 알려진 것같이"라는 표현도 있습니다. 앎은 먼저 하나님이 나를 아시는 일이고, 그 앎 안에서 내가 알게 되는 일입니다.

소마(σῶμα)는 ‘몸’입니다. 이 말은 단순히 살과 뼈만이 아니라 한 사람 전체, 곧 인격이 몸을 입고 사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성경이 구원을 ‘영혼’만이 아니라 ‘몸’의 부활이라고 말하는 것은, 구원받는 것이 몸을 입은 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서로를 알아볼 수 있으리라는 소망을 떠받치는 바탕입니다.

흔한 반론과 답

"몸이 썩어 흩어지는데 같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가? 알아본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 몸의 물질은 분해되고 다른 것의 일부가 되기도 하므로, 부활한 사람이 같은 사람일 수 없다고 보는 이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씨앗의 비유로 답합니다. 심은 알갱이와 거둔 열매는 모양이 다르지만 같은 생명에서 이어집니다 (고전 15:35-38). 사람의 정체성을 이어 주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어떤 방식으로 이어지는지 우리가 다 알지 못한다는 점은 정직하게 말해야 합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께서 같은 분으로 알려지셨다는 사실이 이 소망의 닻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그곳에 없다면 천국이 어떻게 행복할 수 있겠는가? 서로 알아본다면 오히려 더 큰 슬픔이 아닌가?" 이 반론은 가볍게 답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이 실제로 이 고통을 안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 질문에 쉬운 답을 주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또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시리라. 다시는 사망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없으며 또 아픔도 다시는 없으리니 이는 이전 것들이 지나갔기 때문이라, 하더라."리라는 약속입니다 (계 21:4). 그 눈물이 어떻게 씻기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또한 누가 구원받았는지를 판단하는 일은 우리의 몫이 아니라, "주께서 이런 식으로 행하여 의로운 자들을 사악한 자들과 함께 죽이시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으며 의로운 자들을 사악한 자들처럼 여기시는 것도 결코 있을 수 없나이다. 온 땅의 심판자께서 의롭게 행하여야 하지 아니하리이까? 하매"의 몫입니다 (창 18:25). 성경이 말하지 않는 것을 확신 있게 단정하기보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공의에 맡기는 쪽이 더 정직하다고 보는 그리스도인이 많습니다. 슬픔이 있다면 그 슬픔은 하나님 앞에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이에 관해서는 슬픔을 어떻게 견딜 수 있는가?도 도움이 됩니다.

"예수께서 부활 때에는 장가도 시집도 가지 않는다고 하셨다면, 부부와 가족의 관계는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이 질문은 흔히 남편이나 아내를 먼저 보낸 사람이 묻기에, 조심스럽게 답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일곱 형제와 차례로 혼인한 여인에 대한 사두개인의 질문에 답하시면서였고, 요점은 부활의 삶이 이 땅의 삶을 단순히 연장한 것이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혼인이라는 제도가 그치는 것과 사랑이 그치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닙니다. 바울은 "사랑은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되 대언은 있다 해도 없어질 것이요, 타언어들도 있다 해도 그칠 것이며 지식도 있다 해도 사라지리라."라고 말하고 (고전 13:8), 매튜 헨리는 하늘에서 "서로를 완전하게 사랑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매튜 헨리. 이 땅의 혼인이 가리키던 사랑이 어떻게 완성될지는 아직 다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정직한 답은 ‘사라진다’가 아니라 ‘어떻게 될지 아직 모른다’입니다.

더 생각해 보기

서로를 알아볼 수 있는가라는 질문 뒤에는 대개 한 사람의 얼굴이 있습니다. 성경은 그 간절함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며, 바울도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서로 위로하라"고 권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소망을 가장 큰 것에 닻을 내리게 합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내가 가장 다시 보고 싶은 사람은 누구이며, 그 마음은 나를 어디로 이끕니까? 알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일은 나에게 어떻습니까? 지금 내 곁의 사람들과 나누는 사귐을, 장차 완성될 사귐의 시작으로 바라본다면 어떻게 달라질까요?

더 읽으려면 죽음 뒤에는 무엇이 있는가?, 영생이란 무엇인가?, 천국과 지옥은 실재하는가?를 보십시오. 데살로니가전서 4장과 고린도전서 13장을 천천히 읽는 것도 좋습니다.

출처

  1. 고대 교회, 사도신경 — 로마 교회의 세례 신앙고백에서 자란 서방 교회의 기본 신조. 읽기

성경과 고전 주석을 바탕으로, 역사적 기독교 신앙(사도신경, 니케아 신경)의 관점에서 쓴 글입니다. 그리스도인 사이에 견해가 갈리는 문제는 여러 견해를 함께 소개합니다. 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