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어려서 죽은 아이는 어떻게 되는가?

짧은 답

성경은 어려서 죽은 아이의 운명을 직접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소망, 아이들을 품으신 예수,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의 공의와 사랑은 그리스도인들이 크고 깊은 소망을 품도록 이끌어 왔습니다. 교회는 이 소망을 어떻게 표현할지에서 서로 다르지만, 하나님이 이 아이들을 외면하시리라고 보는 전통은 오늘날 거의 없습니다. 이 글은 확답할 수 없는 곳에서는 확답하지 않고, 슬픔 가운데 있는 부모에게 줄 수 있는 소망을 말합니다.

성경의 답

먼저 솔직하게 말해야 합니다. 성경에는 이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답이 없습니다. 그래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도 표현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성경이 침묵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예수께서 아이들을 어떻게 대하셨는지, 슬퍼하는 사람이 어떤 소망을 품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다윗의 이야기가 가장 가까운 본문입니다. 밧세바가 낳은 아이가 병들었을 때 다윗은 금식하며 땅에 엎드려 아이를 살려 달라고 간구했습니다. 아이가 죽자 그는 일어나 몸을 씻고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 경배했습니다 (삼하 12:20).

그가 이르되, 아이가 아직 살아 있을 때에 내가 금식하고 운 것은 내가 말하기를, 혹시 하나님께서 내게 은혜를 베푸사 아이를 살려 주실지 누가 알리요? 하였기 때문이거니와 지금은 그가 죽었으니 어찌하여 내가 금식하리요? 내가 그를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삼하 12:22-23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를 많은 신자가 죽음 너머에서의 만남에 대한 소망으로 읽어 왔습니다. 다만 이 말이 단순히 "나도 언젠가 죽는다"는 뜻일 수 있다고 보는 학자도 있어서, 이 한 구절만으로 결론을 내리지는 않는 것이 정직합니다.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자비로운 분임을 알았고, 그래서 울던 자리에서 일어나 예배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아이들을 데려오는 사람들을 제자들이 막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보시고 심히 기뻐하지 아니하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그들을 막지 말라. 하나님의 왕국은 그런 자들의 것이니라.

막 10:14

마가는 예수께서 "팔로 그들을 안고 그들에게 안수하시며 그들을 축복하시니라."고 전합니다 (막 10:16). 이 말씀은 아이들의 죽음을 직접 말하지 않지만, 예수께서 아주 어린 아이들을 어떻게 대하시는지는 분명히 보여 줍니다. 다만 "이런 자의 것"이 아이들 자신을 가리키는지, 아이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을 가리키는지를 두고 해석이 나뉩니다. 테오필락투스는 예수께서 "이들의 것"이 아니라 "이런 자의 것"이라 하신 점을 주목하여 주로 아이 같은 단순함을 가진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읽었습니다 테오필락투스. 어느 쪽으로 읽든, 어린아이는 하나님 나라와 가장 가까운 사람의 모습으로 제시됩니다.

또 하나의 근거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아브라함은 소돔을 위해 간구하며 묻습니다.

주께서 이런 식으로 행하여 의로운 자들을 사악한 자들과 함께 죽이시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으며 의로운 자들을 사악한 자들처럼 여기시는 것도 결코 있을 수 없나이다. 온 땅의 심판자께서 의롭게 행하여야 하지 아니하리이까? 하매

창 18:25

하나님은 요나에게 니느웨를 아끼는 이유를 말씀하시면서 "오른손과 왼손을 분간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 명이 넘고 또 많은 가축이 있는 저 큰 도시 니느웨를 내가 아껴야 하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이라고 하십니다 (욘 4:11). 하나님은 분별하지 못하는 이들까지 마음에 두십니다. 예수께서는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고 하시며 소자 중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고 하십니다 (마 18:14). 이 마지막 말씀은 직접적으로는 믿는 작은 자들에 대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으므로 조심스럽게 읽어야 합니다.

성경은 또 모든 사람이 죄 가운데 태어났다고 말합니다 (시 51:5). 그래서 문제는 아이의 순수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가 믿음의 응답을 할 수 없는 아이에게 어떻게 미치는가입니다.

교회의 증언

교회의 역사에는 서로 다른 소리가 있었습니다. 먼저 어두운 대목을 말해야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은 아기가 정죄받는다고 보았고, 다만 가장 가벼운 형벌이라고 했습니다. 이 영향으로 서방 교회에는 오랫동안 불안이 컸고, 중세에는 이들이 고통 없는 자연적 행복의 상태에 있다는 '림보'의 견해가 나왔으나 이것은 신앙의 조항으로 정해진 적이 없습니다.

오늘날 상황은 크게 달라졌습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1992년, 1261항)는 세례 없이 죽은 아이들을 하나님의 자비에 맡기며, 하나님의 크신 자비와 아이들을 향한 예수의 자애로움이 이들에게도 구원의 길이 있으리라는 소망을 품게 한다고 가르칩니다. 2007년 국제신학위원회도 이 소망에 상당한 신학적·전례적 근거가 있다고 정리했습니다. 이것은 확정된 교리가 아니라 소망입니다. 동방 정교회는 이 문제를 체계적으로 규정하지 않고 아이를 하나님의 자비에 맡깁니다. 루터는 세례 전에 아기를 잃은 어머니들을 위로하며, 하나님이 부모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셨음을 믿고 아이를 그 자비에 맡기라고 권했으나 확언하지는 않았습니다.

개혁파 전통에서 도르트 신조는 믿는 부모가 어려서 죽은 자녀의 구원을 의심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신자의 자녀를 언약 안에서 거룩하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고전 7:14 참고). 이 근거는 신자의 자녀에게는 분명한 위로를 주지만 신자가 아닌 부모의 자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후대의 많은 개혁파 신학자, 예컨대 찰스 하지와 B. B. 워필드는 어려서 죽는 모든 아이가 구원받는다고 가르쳤습니다. 감리교와 침례교회를 비롯한 많은 복음주의 교회도 그리스도의 속죄가 응답할 수 없는 아이들을 덮는다고 가르치며 흔히 '책임 연령'을 말합니다. 비판하는 이들은 성경이 그런 나이를 명시하지 않는다고 지적합니다.

이 차이 속에서도 모두가 인정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시고 자비로우시다는 것, 구원은 아이의 무죄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일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매튜 헨리는 다윗의 이야기에서 이렇게 씁니다. "우리 자녀를 위한 기도는 그 가운데 어떤 아이가 어려서 죽을 때에도 은혜롭고 충분하게 응답받은 것입니다. 그 아이들은 잘 보살핌을 받기 때문입니다" 매튜 헨리. 이것은 약속의 형태가 아니라 한 신실한 목회자의 소망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무 작거나 너무 어려서 그리스도께 데려올 수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섬길 능력이 없는 이들에게도 어떻게 은혜를 베푸실지 아십니다" 매튜 헨리.

원어로 보기

마가복음 10장의 "어린 아이"는 헬라어 파이디온(παιδίον)입니다. 어린아이 전반을 가리키는 낱말입니다. 같은 사건을 전하는 누가복음 18:15는 더 구체적인 브레포스(βρέφος), 곧 "아기"라는 낱말을 씁니다. 말도 못 하는 아기들이었음을 누가가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이 아이들은 예수께 아무것도 가져올 수 없었고, 예수는 그들을 안으셨습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가리키는 말은 라하밈(רַחֲמִים)입니다. "긍휼"로 옮기는 이 말은 "태"를 뜻하는 낱말과 가까워서, 어머니가 품 안의 아이에게 느끼는 마음을 떠올리게 합니다. 시편 103:13은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신다고 합니다 (시 103:13).

흔한 반론과 답

"성경은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는데, 믿을 수 없는 아기는 어떻게 구원받는가?" 이것은 가장 무거운 반론입니다. 믿음 없이 구원이 없다면 아기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교회의 답은, 구원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일에서 나오고 우리의 믿음이라는 업적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보통 그 구원을 받는 방식이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능력만큼만 미치는 것은 아닙니다. 누가복음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요한이 엘리사벳의 태 안에서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즉시로 아기가 내 태 속에서 기뻐 뛰놀았도다."라는 엘리사벳의 말을 전합니다 (눅 1:44). 이것이 모든 아이에 대한 증명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말 못 하는 존재 안에서도 일하실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것은 성경이 약속하지 않은 위로를 주는 것이 아닌가? 거짓 위로가 아닌가?" 이 비판은 존중해야 합니다. 교회가 성경이 말하지 않는 확신을 줄 수는 없습니다. 이 글도 모든 아이에 대해 확실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침묵하는 곳에서도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말합니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약속이 아니라 근거 있는 소망이며, 그 소망의 근거는 우리의 바람이 아니라 아이들을 안으신 예수와 공의와 자비의 하나님입니다. 소망은 확신과 같지 않지만 거짓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아이들이 어려서 죽는 것이 오히려 복이 아닌가?" 이 생각은 때로 위로로 건네지지만 성경이 가르치는 바가 아닙니다. 다윗은 아이가 살기를 바라며 금식했고, 예수께서는 친구의 무덤 앞에서 우셨습니다 (요 11:35). 성경은 생명을 선물로 보며 죽음을 원수로 말합니다. 그러므로 아이를 잃은 슬픔은 작은 것이 아니며, 소망이 있다고 해서 상실이 줄어드는 것도 아닙니다.

더 생각해 보기

아이를 잃은 부모에게 먼저 말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슬퍼하는 것은 믿음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바울은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한다고 하는데, 그것은 슬퍼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소망 가운데 슬퍼하라는 말입니다 (살전 4:13). 시편 기자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내가 떠도는 것을 주께서 세시오니 내 눈물들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그것들이 주의 책에 있지 아니하나이까?" (시 56:8). 하나님은 당신의 눈물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십니다.

또 하나, 죄책감을 지지 마십시오. 다윗의 아이는 나단을 통해 받은 특별한 말씀 가운데 죽었지만 (삼하 12:14), 성경은 그것을 모든 부모에게 일반화하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불행을 누군가의 죄로 돌리려는 물음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의 부모나 죄를 짓지 아니하였으며 다만 이것은 그에게서 하나님의 일들을 나타내고자 함이니라."고 대답하셨고 (요 9:3), 에스겔은 "죄를 짓는 혼, 그 혼은 죽을지니라. 아들이 아버지의 불법을 담당하지 아니하며 아버지가 아들의 불법을 담당하지 아니하리니 의로운 자의 의가 그 위에 임하고 사악한 자의 악이 그 위에 임하리로다."라고 합니다 (겔 18:20). 아이의 죽음을 부모의 죄에 대한 벌로 읽을 근거는 성경에 없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이 목자처럼 "그분께서는 목자같이 자기 양 떼를 먹이시고 어린양들을 자기 팔로 모아 품에 안아 옮기시며 어린것들과 함께하는 어미들을 부드럽게 인도하시리로다." 인도하신다고 말합니다 (사 40:11). 그리고 마지막에는 하나님이 모든 눈물을 씻기시고 다시 사망이 없으리라는 약속이 있습니다 (계 21:4). 우리가 아는 것은 많지 않지만, 아이를 맡기는 분이 누구인지는 압니다.

스스로 물어볼 수 있습니다. 나는 아는 것과 소망하는 것의 차이를 구별하고 있습니까? 슬픔 가운데서 하나님께 솔직한 말을 해도 괜찮다고 믿습니까? 슬퍼하는 이웃 곁에 나는 어떻게 머물 수 있겠습니까?

더 읽으려면 슬픔을 어떻게 견딜 수 있는가?, 왜 아이들이 고통받는가?, 천국에서 서로 알아볼 수 있는가?를 보십시오.

성경과 고전 주석을 바탕으로, 역사적 기독교 신앙(사도신경, 니케아 신경)의 관점에서 쓴 글입니다. 그리스도인 사이에 견해가 갈리는 문제는 여러 견해를 함께 소개합니다. 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