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아이들이 고통받는가?
성경은 아이들의 고통에 대해 모든 것을 설명해 주는 답을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고통을 보고 계시며, 아이들을 해치는 일을 악으로 규정하시고, 그 일을 한 사람들을 심판하실 것이며, 예수께서 아이들을 품에 안으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더는 울지 않을 날을 약속합니다. 이 글은 그 약속이 지금의 고통을 지워 주지는 않는다는 점도 정직하게 인정합니다.
성경의 답
이 질문에는 쉬운 답이 없습니다. 어른의 고통에는 어떤 설명이라도 시도해 볼 수 있지만, 아이의 고통 앞에서는 설명이 모욕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분이 병상의 아이 곁에 있거나 아이를 잃었거나 어린 시절의 상처를 안고 있다면, 이 글이 먼저 약속하는 것은 하나뿐입니다. 가볍게 말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먼저 보여 주는 것은 하나님이 이 고통을 모르는 체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시편 기자는 힘없는 아이들을 해치는 악인들을 두고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께서 그것을 보셨나이다. 주께서는 해악과 악의를 바라보시며 주의 손으로 그것을 벌하시나이다. 가난한 자가 자기를 주께 맡기나니 주는 아버지 없는 자를 돕는 분이시니이다.
시 10:14
성경은 이 일을 하나님이 못 본 일로도, 하나님이 좋게 여기시는 일로도 그리지 않습니다. 마태복음은 예수께서 나신 이야기 한가운데에 아이들의 죽음을 숨기지 않고 적어 둡니다. 헤롯은 베들레헴과 그 지경 안에 있는 두 살 아래의 사내아이들을 모두 죽였고, 마태는 예레미야의 말을 인용해 이렇게 씁니다 (마 2:16).
라마에서 거기서 애통하고 슬피 울며 크게 애곡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이것은 라헬이 자기 아이들로 인하여 슬피 우는 것이라. 그들이 있지 아니하므로 그녀가 위로 받기를 원치 아니하였도다, 하였느니라.
마 2:18
복음서는 이 어머니들에게 서둘러 위로의 말을 건네지 않습니다. 위로를 거절하는 슬픔이 있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 기록합니다.
그다음으로 성경은 예수께서 아이들을 어떻게 대하셨는지 보여 줍니다. 사람들이 아이들을 데려오자 제자들이 막았습니다. 그때 예수께서는 화를 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보시고 심히 기뻐하지 아니하사 그들에게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그들을 막지 말라. 하나님의 왕국은 그런 자들의 것이니라.
막 10:14
예수께서는 아이들을 안고 손을 얹어 축복하셨습니다 (막 10:16). 그리고 아이들을 해치는 일에 대해서는 몹시 무서운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의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매달고 바다 깊은 곳에 빠지는 것이 그에게 더 나으리라.
마 18:6
이 말씀은 아이를 해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무심하지 않으시다는 뜻입니다. 아이를 학대한 사람들의 일은 결코 그냥 지나가지 않습니다. 같은 대목에서 예수께서는 이렇게도 말씀하십니다. 이 소자 중에 하나라도 잃어지는 것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 18:14). 아이를 해치는 일은 제 이름으로 불립니다. 곧 악입니다.
마지막으로 성경은 이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이 새롭게 하실 세상을 이렇게 그립니다.
그들이 헛되이 수고하지 아니하고 고난을 위해 열매를 맺지도 아니하리니 그들은 주에게 복 받은 자의 씨요, 그들과 함께하는 그들의 후손도 그와 같으리라.
사 65:23
이 대목은 젖먹이가 며칠 살다 죽는 일이 더는 없을 것이라는 약속과 함께 나옵니다 (사 65:20). 그리고 요한계시록은 이렇게 맺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시리라. 다시는 사망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없으며 또 아픔도 다시는 없으리니 이는 이전 것들이 지나갔기 때문이라, 하더라.
계 21:4
교회의 증언
교회는 이 질문 앞에서 이유를 아는 척하기보다 함께 우는 쪽에 서려고 해 왔습니다. 그리고 이 질문을 가장 날카롭게 던진 사람 가운데 하나는 소설 속 인물입니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에서 이반 카라마조프는 신문에서 모은 아이들에 대한 잔혹한 실화를 동생 알료샤에게 들려줍니다 도스토옙스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그는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아이 한 명의 눈물 위에 세워지는 조화로운 세계라면 그 입장권을 정중히 돌려드리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동생에게 묻습니다. 단 한 아이를 고문하는 대가로 인류가 영원히 행복해진다면 너는 그 건축가가 되겠느냐고. 알료샤는 조용히 아니라고 답합니다. 그러고는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는 분, 곧 죄 없는 피를 흘리신 분이 계시다고 말합니다. 이 장면이 오랫동안 읽혀 온 까닭은 소설가가 답을 증명해서가 아니라, 반론을 약하게 만들지 않고 가장 강하게 말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교부들은 헤롯의 학살을 읽으면서 하나님이 하신 일과 사람이 한 일을 나누어 보려 했습니다. 위(僞)크리소스토무스는 라마에서 들린 소리에 대해 이렇게 씁니다. "무죄한 자들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나온 소리이므로 높은 곳에서 들렸다고 할 수 있으니" 위(僞)크리소스토무스. 죄 없는 이들의 울음은 하늘에 닿는다는 뜻입니다. 매튜 헨리는 마태복음 18장의 소자를 풀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는 모든 자녀를 돌보지만 어린 자녀들에게 특히 자상합니다" 매튜 헨리. 이사야 65장에 대해서는 약속의 날을 이렇게 풀이합니다. "그때에는 자녀가 부모의 근심거리가 되지도 않고 스스로 근심을 당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매튜 헨리.
악이 왜 허락되는지, 하나님의 주권과 사람의 자유를 어떻게 이해할지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서로 다른 신학이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선하신 하나님이 왜 악을 허락하시는가?에서 다룹니다. 다만 모든 신학이 함께 서 있는 자리가 있습니다. 아이를 해치는 일은 악이며, 하나님은 그 악을 이기실 것이라는 점입니다.
원어로 보기
예수께서 "실족케 하면"이라고 하실 때 쓰신 말의 명사형은 스칸달론(σκάνδαλον)입니다. 본래 덫이나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장애물을 가리키는 말로, 누군가를 걸려 넘어지게 하고 죄와 불신으로 끌고 가는 것을 뜻합니다. 아이의 순전한 신뢰를 짓밟는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일에 연자 맷돌의 비유까지 드신 것은 아이들의 믿음과 몸과 삶을 얼마나 무겁게 여기시는지를 보여 줍니다.
시편 10편과 68편에 나오는 히브리어 야톰(יָתוֹם)은 "고아"를 뜻합니다. 아버지 없는 아이는 고대 사회에서 보호해 줄 사람이 없는 대표적인 약자였습니다. 시편은 하나님이 바로 이들의 편에 서신다고 말합니다.
아버지 없는 자들의 아버지이시며 과부들의 재판장이신 분은 자신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이시로다.
시 68:5
성경이 하나님을 가장 약한 아이의 아버지와 변호인으로 소개한다는 사실은, 이 질문을 던지는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과 먼 곳에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흔한 반론과 답
"한 아이의 눈물조차 정당화될 수 없다. 나중에 아무리 좋은 세상이 와도 그 아이의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 반론은 이반 카라마조프의 항의이며, 가장 강한 형태로 말하면 이렇습니다. 어떤 미래의 행복도 이미 일어난 학대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 점은 옳습니다. 성경은 아이의 고통이 ‘더 큰 선을 위해 필요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악이라 부르고, 그 악을 행한 자에게 심판을 선언하며, 하나님이 이 악을 이기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의 약속은 고통에 대한 보상금이 아니라 악의 패배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이미 일어난 일을 되돌려 주지는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정직하게 덧붙일 수 있는 말은 하나님이 이 고통을 멀리서 보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되어 오셔서 무력한 몸으로 폭력을 당하셨고, 하나님은 그 안에서 가장 약한 자의 자리에 서셨습니다 (빌 2:6-8).
"하나님이 정말 계시고 아이들을 사랑하신다면 왜 막지 않으셨는가? 막을 수 있는 사람이 막지 않으면 우리는 그를 죄인이라 부른다." 이것도 가볍지 않은 물음입니다. 성경은 이 질문의 이유를 끝내 풀어 주지 않습니다. 욥의 이야기가 그렇듯 하나님은 이유가 아니라 자신을 보이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점에 대해서도 하나로 말하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고 그 자유가 남용되는 위험까지 감수하셨다고 말하고,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으면서도 악의 책임은 오직 사람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어느 쪽도 부모를 잃은 아이나 아이를 잃은 부모에게 충분한 답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두 흐름 모두 이유를 설명하기보다 기다림과 탄원의 기도로 나아갑니다. 시편 22편의 외침 같은 기도를 성경은 그대로 남겨 두었습니다.
"세상을 떠난 아이는 어디로 갔는가?" 이것은 많은 부모가 가장 두려워하는 물음입니다. 이 글에서 모든 것을 다룰 수는 없지만, 다윗이 죽은 아들에 대해 "지금은 그가 죽었으니 어찌하여 내가 금식하리요? 내가 그를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그에게로 가려니와 그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하니라."라고 말한 것은 (삼하 12:23) 많은 그리스도인에게 위로가 되어 왔습니다. 이 질문은 어려서 죽은 아이는 어떻게 되는가?에서 따로, 교회의 서로 다른 이해와 함께 다룹니다.
더 생각해 보기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정직한 대답은 길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이들의 고통을 보고 계시고 결코 무심하지 않으시며, 예수께서는 아이들을 안으신 분이고, 악은 끝날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의 눈물을 닦아 주지 못하지만, 눈물이 마지막이 아니라고 말해 줍니다.
그리고 이 질문은 우리에게도 요구를 합니다. 예수께서 분히 여기신 것은 아이들을 막는 어른들이었습니다. 아이를 지키는 일은 하나님께 질문하는 일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잠언은 입을 열어 말 못 하는 자를 위해 변호하라고 합니다 (잠 31:8). 아이가 학대받고 있다고 의심되면 침묵하지 말고 112에 신고하십시오. 교회와 공동체 안에서도 아이들의 말을 믿고 귀 기울이는 일이 필요합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나는 지금 이 질문을 이론으로 던지고 있습니까, 상처로 안고 있습니까? 고통받는 아이와 그 부모 곁에서 나는 이유를 말해 주려 하고 있습니까, 함께 있어 주려 하고 있습니까? 내가 속한 곳에서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더 읽으려면 고난에도 의미가 있는가?와 슬픔을 어떻게 견딜 수 있는가?를 보십시오. 시편 22편과 88편을 천천히 읽어 보는 것도 좋습니다.
관련 질문
- 선하신 하나님이 왜 악을 허락하시는가?성경은 이 질문을 피하지 않지만 모든 것을 설명하는 이론도 주지 않습니다. 세상은 선하게 창조되었으나 죄로 망가졌고, 하나님은 악 가운데서도 선을 이루시며, 욥에게는 설명 대신 당신 자신을 보이셨고, 십자가에서는 고난 속으로 직접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악이 끝나는 날을 약속하십니다.
- 어려서 죽은 아이는 어떻게 되는가?성경은 어려서 죽은 아이의 운명을 직접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소망, 아이들을 품으신 예수,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의 공의와 사랑은 그리스도인들이 크고 깊은 소망을 품도록 이끌어 왔습니다. 교회는 이 소망을 어떻게 표현할지에서 서로 다르지만, 하나님이 이 아이들을 외면하시리라고 보는 전통은 오늘날 거의 없습니다. 이 글은 확답할 수 없는 곳에서는 확답하지 않고, 슬픔 가운데 있는 부모에게 줄 수 있는 소망을 말합니다.
- 고난에도 의미가 있는가?성경은 모든 고난에 이유를 붙이지 않으며, 고난이 언제나 벌이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탄식을 믿음의 말로 받아 주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그리스도가 고난 속에 함께하시며, 고난받은 사람이 같은 처지의 사람을 위로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의미는 설명이 아니라 함께하심과 소망 안에서 주어집니다.
- 슬픔을 어떻게 견딜 수 있는가?슬픔은 믿음이 없다는 표시가 아니라 사랑의 다른 얼굴입니다. 예수께서도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셨고, 성경은 소망 없는 사람처럼 슬퍼하지 말라고 할 뿐 슬퍼하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다. 슬픔에는 시간이 걸리며, 하나님은 마음이 상한 사람 가까이 계시고, 교회는 우는 사람과 함께 웁니다.
관련 주제
출처
- 도스토옙스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5권 4장 / Book 5.4 (1880) — 아이들의 고통을 근거로 한 이반의 항변.
성경과 고전 주석을 바탕으로, 역사적 기독교 신앙(사도신경, 니케아 신경)의 관점에서 쓴 글입니다. 그리스도인 사이에 견해가 갈리는 문제는 여러 견해를 함께 소개합니다. 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