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이란 무엇인가?
복음은 ‘기쁜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 안에서 왔고,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사흘째 다시 살아나셨으며, 그래서 누구든지 돌이켜 그분을 믿고 용서와 새 삶을 받을 수 있다는 소식입니다. 복음은 따라야 할 충고가 아니라 이미 일어난 사건에 대한 소식이며, 사람은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성경의 답
‘복음’은 헬라어 에우앙겔리온, 곧 ‘좋은 소식’을 옮긴 말입니다. 소식은 충고와 다릅니다. 충고는 “이렇게 살아라”고 말하지만 소식은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전쟁터에서 달려온 전령이 승리를 알릴 때 그는 병사들에게 무엇을 하라고 하지 않고, 이미 이긴 싸움을 알려 줍니다. 성경이 말하는 복음도 그런 소식입니다. 이사야는 오래전에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좋은 소식을 가져오고 화평을 선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고 구원을 선포하며 시온에게 이르기를, 네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사 52:7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가 소식의 내용입니다. 신약은 이 소식이 예수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선포합니다. 마가복음은 책의 첫 줄에서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막 1:1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며 외치신 첫 말씀도 이 소식이었습니다.
이제 요한이 감옥에 갇힌 뒤에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왕국의 복음을 선포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왕국이 가까이 왔으니 너희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막 1:14-15
여기에 복음의 첫째 면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곧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예수의 오심과 함께 사람들 가운데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이 일이 자신이 보내심을 받은 목적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눅 4:43). 그리고 그 소식에는 부름이 따릅니다. 돌이키고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나라의 왕은 십자가를 거쳐 왕이 되셨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복음의 내용을 가장 간결하게 요약해 줍니다. 그가 “받은 것”, 곧 자기보다 앞서 교회가 전해 준 것입니다.
내가 또한 받은 것을 무엇보다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그것은 곧 성경 기록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들로 인하여 죽으시고 묻히셨다가 성경 기록대로 셋째 날에 다시 살아나시고
고전 15:3-4
이 짧은 요약에는 네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죽으셨고, 장사되었고, 살아나셨으며, 그 죽음이 “우리 죄를 위한” 것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자신이 온 것이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오지 아니하고 도리어 섬기며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느니라, 하시니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막 10:45).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라는 소식과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소식은 서로 다른 복음이 아닙니다. 왕이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죽음을 이기심으로 그 나라의 문을 여셨다는 한 소식입니다.
바울은 이 소식을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그 복음이 믿는 모든 자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권능이기 때문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그리스인에게로다.
롬 1:16
복음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이루어 내는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이 구원을 이루셨다는 알림이며, 그 소식이 전해질 때 하나님이 사람을 움직이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소식을 사랑의 증거로도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롬 5:8).
교회의 증언
교회는 처음부터 이 소식을 짧은 고백으로 외웠습니다. 사도신경은 그리스도께서 고난받고 죽고 장사되셨으며 사흘째 다시 살아나셨음을 고백합니다 사도신경. 이 고백은 세례를 받는 사람이 대답하던 물음과 답에서 자랐다고 역사가들은 봅니다. 복음이 곧 그리스도께 대한 소식이므로 교회는 이 소식을 전하는 네 권의 책을 ‘복음서’라고 불렀고, 그 책들은 한 가지 복음을 네 사람이 전한다고 보았습니다.
매튜 헨리는 마가복음 1:15를 풀며 이렇게 말합니다. “회개로써 우리는 우리가 거역한 창조주께 영광을 돌리며, 믿음으로써 우리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구속자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이 둘을 함께 묶으셨으니 아무도 그것을 갈라놓으려 생각하지 말라고 덧붙입니다 매튜 헨리. 로마서 1:16-17에 대해서는 이렇게 씁니다. “믿음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작에서나 진행에서나 모든 것입니다.” 매튜 헨리 복음은 입문 때 한 번 듣고 지나가는 소식이 아니라, 신자가 평생 서 있는 자리라는 뜻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첫 물음에서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위로가 무엇인지 묻고, 살아서나 죽어서나 몸도 영혼도 내 것이 아니라 신실하신 구주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데 있다고 답합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1문. 복음은 이렇게 교리이기 전에 위로였습니다.
복음의 강조점을 두고는 오늘도 교회 안에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전통은 죄 용서와 칭의를 복음의 중심에 놓고, 어떤 이들은 예수께서 왕이시며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다는 선포를 앞세웁니다. 그러나 두 쪽 모두 위의 마가복음 1장과 고린도전서 15장을 인정합니다. 서로 다른 것은 어느 면을 먼저 말하느냐이지, 어느 쪽을 부정하느냐가 아닙니다.
원어로 보기
에우앙겔리온(εὐαγγέλιον)은 본래 좋은 소식을 가져온 사람에게 주는 상, 또 그 소식 자체를 가리킨 말입니다. 로마 시대에는 황제의 탄생이나 즉위, 승리를 알리는 소식에도 이 말이 흔히 복수형으로 쓰였습니다. 주전 9년 무렵 소아시아의 프리에네에 세워진 비문은 아우구스투스의 생일이 세상에 좋은 소식들의 시작이 되었다고 기립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는 그리스도인들이 이 말을 쓴 데서 조용한 도전을 듣습니다. 참된 왕의 좋은 소식은 예수에 관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다른 학자들은 이 말의 더 깊은 뿌리가 이사야의 ‘좋은 소식’에 있다고 강조합니다. 두 울림이 함께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동사 에우앙겔리조마이(εὐαγγελίζομαι)는 이사야 52:7의 히브리어 바사르(בָּשַׂר), ‘소식을 전하다’와 이어져 있습니다.
예수께서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실 때 ‘회개’는 메타노에오(μετανοέω)입니다. 생각을 바꾸고 방향을 돌이킨다는 뜻입니다. ‘믿다’는 피스튜오(πιστεύω)로, 어떤 일이 사실이라고 인정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에 자신을 맡기며 신뢰한다는 뜻을 가집니다. 복음은 이처럼 알아들어야 하는 소식이자 의지해야 하는 소식입니다.
흔한 반론과 답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와 아버지의 값없는 용서를 전하셨을 뿐이고, 죄를 위한 속죄로서의 십자가는 바울이 만들어 낸 교리다.” 이 반론을 가장 강하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처음 세 복음서에서 예수께서는 자기 죽음보다 하나님 나라를 훨씬 많이 말씀하시고,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아무 제물 없이 아들을 용서합니다. 반면 복음서보다 먼저 쓰인 바울의 편지는 십자가에 훨씬 큰 무게를 둡니다. 이 강조점의 차이는 실제로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바울의 창작으로 보기 어려운 이유도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의 요약을 자기가 “받은 것”이라고 하는데, 회의적인 학자들을 포함해 많은 학자가 이 요약이 십자가 사건 뒤 몇 해 안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봅니다. 바울은 또 다른 사도들도 같은 것을 전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나든지 그들이든지 우리가 그렇게 선포하매 너희가 그렇게 믿었느니라.” (고전 15:11). 그 사도들이 살아 있어 반박할 수 있던 때에 한 말입니다. 그리고 복음서는 대속물 말씀과 함께, 마지막 만찬에서 예수께서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린 나의 피 곧 새 상속 언약의 피니라.”고 하셨다고 전합니다 (막 14:24). 마가복음이 바울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으므로 이것이 모두를 설득하지는 못합니다. 그래도 나라의 선포와 십자가를 하나의 이야기로 읽을 근거는 충분합니다.
“구원받아야 한다는 말이 오히려 사람에게 죄책감을 주어 믿게 만드는 압박 아닌가?” 교회가 역사에서 협박이나 강요로 이 소식을 전한 일이 있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복음이 좋은 소식인 까닭은 협박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값을 치를 수 없는 사람에게 값없이 주어지는 용서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먼저 하신 말씀은 “너희는 죄인이다”가 아니라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였습니다. 죄는 그 소식이 왜 필요한지를 설명할 뿐이며, 소식의 시작은 아닙니다. 그리고 소식을 받아들이는 일은 강요로 될 수 없고, 자유롭게 믿고 신뢰하는 응답이어야 합니다. 복음은 이렇게 늘 청함이지 압박이 아닙니다. 듣는 사람은 이것을 거절할 자유도 있습니다.
더 생각해 보기
복음을 ‘더 좋은 삶을 위한 방법’으로 듣는 일이 흔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복음은 우리가 이룰 일의 목록이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일의 소식입니다. 이 차이는 중요합니다. 소식은 우리가 얼마나 잘하는가와 상관없이 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열심히 사는 사람에게도, 실패해서 지친 사람에게도 똑같이 건네집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나는 기독교를 주로 지켜야 할 규칙으로 알아 왔습니까, 아니면 일어난 사건에 대한 소식으로 알아 왔습니까? 예수께서 ‘나라가 가까웠다’고 하신 말씀은 내 삶에서 어떤 뜻을 가집니까? 소식을 믿는다는 것은 나에게 어떤 변화를 요구합니까?
더 읽으려면 예수는 왜 죽어야 했는가?, 회개란 무엇인가?, 은혜란 무엇인가?를 보십시오. 마가복음을 한 번에 끝까지 읽어 보는 것도 좋은 출발입니다.
관련 질문
- 예수는 왜 죽어야 했는가?교회는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고 고백해 왔습니다. 그 죽음은 하나님이 죄를 가볍게 보지 않으신다는 표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이 죄인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보여 주는 표입니다. 십자가가 어떻게 구원하는지에 대해서는 몸값, 승리, 희생 제사, 대신 받으신 형벌, 사랑의 계시 같은 여러 그림이 있지만, 그것이 우리를 위한 일이며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왔다는 데에는 모두 한 목소리입니다.
- 회개란 무엇인가?회개는 죄를 두고 마음과 생각을 바꾸어 하나님께로 방향을 돌이키는 일입니다. 그것은 후회나 죄책감에 빠져 있는 것과 다르고, 하나님께서 기다리고 계신 집으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성경은 회개를 사람이 해야 할 응답이자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로 말하며, 한 사람이 돌아올 때 하늘이 기뻐한다고 가르칩니다.
- 은혜란 무엇인가?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값없이 베푸시는 호의와 선물이며, 그 선물은 우리를 용서하고 또 변화시킵니다. 성경은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났다고 말합니다. 은혜는 죄를 가볍게 만드는 면허가 아니라 새 삶을 가르치고 이루는 힘입니다.
- 예수는 정말 부활했는가?교회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장사된 뒤 사흘째에 몸으로 다시 살아나셨다고 고백해 왔습니다. 이것은 수학처럼 증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증거를 저울질하는 문제입니다. 빈 무덤, 여러 사람이 만난 부활하신 주님, 두려워 숨었던 제자들의 변화는 부활이 가장 자연스럽게 설명한다고 그리스도인들은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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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성경과 고전 주석을 바탕으로, 역사적 기독교 신앙(사도신경, 니케아 신경)의 관점에서 쓴 글입니다. 그리스도인 사이에 견해가 갈리는 문제는 여러 견해를 함께 소개합니다. 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