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의 율법은 지금도 지켜야 하는가?
그리스도인은 구원을 얻으려고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어 은혜로 구원받습니다. 그렇다고 율법이 버려진 것은 아닙니다. 율법은 거룩하며, 죄를 드러내고 하나님의 성품을 보여 주고,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습니다. 어떤 명령이 오늘 어떻게 적용되는지는 교회가 오래 고민해 온 문제이며, 신실한 신자들 사이에 이해가 조금씩 다릅니다.
성경의 답
먼저 분명히 해 둘 것이 있습니다. 신약은 율법을 나쁜 것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즉 율법도 거룩하고 명령도 거룩하며 의롭고 선하도다.
롬 7:12
문제는 율법이 아니라 율법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길입니다. 바울은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어떤 육체도 그분의 눈앞에서 의롭게 될 수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알게 되느니라."고 합니다 (롬 3:20). 율법은 거울처럼 우리 모습을 비추지만 우리를 고쳐 주지는 못합니다. 그래서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즉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훈육 선생이었으니 이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게 하려 함이라.
갈 3:24
예수께서는 율법을 대하는 자신의 입장을 산상수훈에서 밝히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대언자들의 글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나는 폐하러 오지 아니하고 성취하러 왔노라.
마 5:17
예수께서는 율법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셨고, 그 속뜻을 더 깊이 드러내셨습니다. 이어지는 가르침에서 살인뿐 아니라 마음의 미움을, 간음뿐 아니라 마음의 음욕을 다루십니다. 또 모든 계명을 두 가지로 요약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마 22:37-40). 바울도 같은 말을 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누구에게든지 어떤 것도 빚지지 말라.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성취하였느니라." (롬 13:8).
한편 초대 교회는 이방인 신자들이 율법을 어디까지 지켜야 하는지 실제로 부딪혔습니다. 유대에서 온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온 어떤 사람들이 형제들을 가르치며 이르되, 너희가 모세의 관례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행 15:1). 예루살렘 회의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이제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들이나 우리나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 하느냐?
행 15:10
회의는 이방인에게 할례와 모세의 율법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했고, 우상의 제물과 피,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만은 멀리하라고 편지했습니다 (행 15:28-29). 구원이 율법이 아니라 "주 예수의 은혜"로 얻어진다는 것이 이 결정의 바탕이었습니다 (행 15:11).
음식과 절기에 관해서도 신약은 말합니다. 마가는 예수께서 "그것은 그의 마음속이 아니라 배 속으로 들어가 모든 음식을 깨끗하게 하고 뒤로 나가느니라, 하시니라."고 풀이합니다 (막 7:19). 바울은 이렇게 씁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먹는 것이나 마시는 것으로 인하여 또 거룩한 날이나 월삭이나 안식일에 관하여 너희를 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그것들은 다가올 것들의 그림자이거니와 몸은 그리스도께 속해 있느니라.
골 2:16-17
제사와 정결 규례, 절기는 그리스도를 미리 가리키는 그림자였다는 뜻입니다. 구약도 새 언약이 올 것을 말했습니다 (렘 31:31).
교회의 증언
교회는 율법의 폐지와 완성을 함께 말해 왔습니다. 크리소스토무스는 마태복음 5:17을 풀면서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어떻게 완전케 하셨는지 설명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선지자들을 완전케 하셨으니, 거기에 자기에 관해 예언된 것을 이루심으로써이고, 율법을 완전케 하셨으니, 첫째 율법의 어떤 계명도 어기지 않으심으로써, 둘째 율법이 문자로는 할 수 없던 것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으로써입니다." 크리소스토무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구약에는 장차 올 것들의 모형이 있었으며, 그리스도께서 그 실체들을 가져오셨을 때 그 모형들은 제거되어야 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그는 바로 그 제거가 율법과 선지자를 이루는 일이라고 봅니다. 또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니, 주께서 자기 성령을 보내심으로 그것을 주셨습니다"라고도 말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
멜란히톤과 칼뱅 같은 종교개혁자들은 율법에 세 가지 쓰임이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죄를 비추는 거울의 역할, 악을 억제하는 역할, 그리고 믿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는 안내자의 역할입니다 칼뱅, 기독교 강요 2권 7장. 루터교 전통은 특히 율법과 복음의 구별을 강조합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요구를 보여 주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몰아가고, 복음은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값없이 줍니다. 매튜 헨리는 갈라디아서 3:24를 풀면서 그 셋째 쓰임을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은 성령의 가르치심으로 죄인이 사랑하는 의무의 규범이 되고, 날마다 자기를 살피는 기준이 됩니다" 매튜 헨리. 골로새서에 관해서는 "실체가 오자 그림자는 사라졌습니다"라고 씁니다 매튜 헨리. 사도행전 15장의 피와 목매어 죽인 것에 대한 금지는 제물의 피를 경외하고 유대인 신자들을 배려하려는 것이었고 "그 이유가 오래전에 사라졌으므로" 신자는 자유롭다고 풀이합니다 매튜 헨리.
원어로 보기
히브리어 토라(תּוֹרָה)는 "가르침, 지침"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말의 "율법"은 법조문을 떠올리게 하지만, 토라는 법뿐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부르신 이야기 전체를 담은 말로 쓰이기도 합니다. 그리스어 번역에서는 노모스(νόμος)라는 말로 옮겼고, 이 번역이 신약의 "율법"이라는 단어로 이어졌습니다. 같은 "율법"이라는 말이 구절에 따라 모세 오경 전체, 의식 규례, 또는 공로로 구원을 얻으려는 원리를 가리킬 수 있어서 문맥을 살펴야 합니다.
마태복음 5:17에서 "완전케 하다"로 옮긴 말은 플레로오(πληρόω)입니다. "가득 채우다, 이루다"라는 뜻입니다. 예언이 이루어질 때, 그리고 말과 행위가 충분한 뜻에 이를 때 쓰이는 말입니다. 이 단어 때문에 예수께서 율법을 폐하신 것도, 그대로 두신 것도 아니라 율법이 가리키던 바를 채우셨다고 이해하게 됩니다.
로마서 10:4의 "마침"은 텔로스(τέλος)입니다. 텔로스는 "끝"일 수도 있고 "목표"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번역은 율법 아래 사는 시대가 끝났다는 쪽으로, 어떤 번역은 율법이 향하던 목표라는 쪽으로 옮깁니다. 바울의 문맥에서는 두 뜻이 모두 담겨 있다고 보는 사람이 많습니다.
흔한 반론과 답
"그렇다면 어느 율법은 지키고 어느 율법은 안 지키는가? 마음대로 고르는 것 아닌가." 이 반론은 진지하게 받아야 합니다. 성경 어디에도 율법을 도덕법, 의식법, 시민법으로 나누는 이름은 없고, 이스라엘은 율법을 하나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고전적인 답은 이 세 구분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했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같은 개혁 전통이 이어받았습니다. 십계명으로 요약되는 도덕법은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성품에서 나왔으므로 계속 유효하고, 제사와 정결 규례(의식법)는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으며, 이스라엘 나라의 사법 규정(시민법)은 그 나라와 함께 끝났으나 그 바탕의 공의는 여전히 가르침이 된다고 봅니다. 이 구분을 지지하는 이들은 예수께서도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바치되 율법의 더 중대한 문제인 판단의 공의와 긍휼과 믿음은 무시하였도다. 너희가 마땅히 이것들을 행하였어야 하거니와 다른 것도 행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말아야 하느니라."을 말씀하셨다고 지적합니다 (마 23:23). 새 언약 신학 같은 다른 견해는 모세의 율법이 한 덩어리로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고, 신자는 이제 "너희는 서로 남의 짐들을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 아래서 사랑과 성령의 인도로 산다고 이해합니다. 그래도 구약의 도덕 가르침은 대부분 신약에서 다시 확인되므로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두 견해 모두 율법의 도덕적 요구가 사랑 안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하며 (롬 8:3-4), 결국 신약이 각 명령을 어떻게 다루는지를 살핀다는 점에서도 같습니다.
"예수께서 율법의 일점 일획도 없어지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러니 안식일과 음식법도 지켜야 한다." 예수께서는 정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5:18). 이 말씀을 따라 지금도 토라를 지키는 사람들이 있고, 유대인 신자들이 자기 전통을 지키며 사는 것은 신약도 허용합니다. 바울 자신도 유대인에게는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며" 되었습니다 (고전 9:20). 그러나 같은 구절은 "다 이루리라"로 끝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이 가리키던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믿으며, 그것이 위에서 본 사도행전 15장과 골로새서 2장의 이유입니다. 이방인에게 할례를 강요하는 것에 대해 바울은 단호했습니다. 그는 할례를 받으려는 사람은 "내가 할례를 받은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온 율법을 행할 의무를 가진 자니라."라고 경고합니다 (갈 5:3). 안식일에 관해서는 신자들 사이에 이해가 다릅니다. 많은 교회는 안식일의 정신, 곧 하나님께 시간을 구별해 드리는 일이 주일에 이어진다고 봅니다. 어떤 신자들은 그리스도 안의 안식이 안식일을 성취했으므로 정해진 날은 필요 없다고 보며, 일곱째 날 안식일을 지키는 교회도 있습니다. 로마서 14:5는 이 문제에서 서로를 정죄하지 말고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하라고 말합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면 윤리도 필요 없어지지 않는가." 바울은 이 질문을 미리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을 통해 율법을 헛되게 만드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참으로 우리가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롬 3:31). 신약의 그리스도인이 율법에서 자유롭다는 말은 마음대로 죄를 지어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구원은 율법 준수의 대가가 아니라 은혜의 선물이지만, 그 은혜는 사랑으로 사는 삶을 낳습니다. 요한은 "우리가 그분의 명령들을 지키는 것, 이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니라. 그분의 명령들은 무겁지 아니하니라."고 씁니다 (요일 5:3). 율법이 가르치던 정의와 긍휼과 신실함은 신약에서도 사라지지 않고, 성령으로 그것을 이루려는 마음이 신자에게 주어집니다.
더 생각해 보기
율법은 두려워할 대상도 우상으로 삼을 대상도 아닙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거룩하고 선하신 분임을 보여 주고, 우리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음을 알려 주며,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을 비추는 빛입니다. 시편 기자가 "오 내가 주의 법을 얼마나 사랑하는지요! 그 법이 종일토록 나의 묵상이 되나이다."라고 노래할 수 있었다면 (시 119:97), 신자도 구약을 사랑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내 행위로 인정받으려 하고 있지 않습니까? 율법이 나의 죄를 비출 때 나는 그리스도에게로 달려갑니까, 아니면 숨습니까? 구약의 한 명령을 만났을 때 신약이 그것을 어떻게 다루는지 함께 읽어 본 적이 있습니까?
더 읽으려면 예수는 무엇을 가르치셨는가?,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은 다른가?, 왜 쉬어야 하는가?를 보십시오.
관련 질문
- 예수는 무엇을 가르치셨는가?예수의 가르침의 중심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선포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셨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으며, 율법의 겉모양이 아니라 마음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가르침은 가르치신 분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예수는 자신을 따르고 자신께 오라고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은 다른가?교회는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이 같은 한 분이라고 고백해 왔습니다. 구약에도 자비가 있고 신약에도 심판이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는 이 하나님을 가장 분명히 드러내신 분입니다. 가나안 정복 같은 어려운 본문은 정직하게 마주해야 하며,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그 해석은 하나로 모이지 않습니다.
- 은혜란 무엇인가?은혜는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값없이 베푸시는 호의와 선물이며, 그 선물은 우리를 용서하고 또 변화시킵니다. 성경은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났다고 말합니다. 은혜는 죄를 가볍게 만드는 면허가 아니라 새 삶을 가르치고 이루는 힘입니다.
- 왜 쉬어야 하는가?성경에서 쉼은 게으름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 때 복 주신 리듬이며, 종 되었던 백성을 위한 자유의 선물입니다. 예수께서는 안식일의 주인이시며 수고하는 자를 쉬게 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쉬는 것은 내 수고가 세상을 붙들고 있지 않다고 인정하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일입니다. 안식일과 주일을 어떻게 지킬지에는 그리스도인 사이에 견해 차이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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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장 칼뱅, 기독교 강요 1559 — 개혁파 신학의 대표 저작. 읽기
성경과 고전 주석을 바탕으로, 역사적 기독교 신앙(사도신경, 니케아 신경)의 관점에서 쓴 글입니다. 그리스도인 사이에 견해가 갈리는 문제는 여러 견해를 함께 소개합니다. 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