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예수는 무엇을 가르치셨는가?

짧은 답

예수의 가르침의 중심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선포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셨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으며, 율법의 겉모양이 아니라 마음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가르침은 가르치신 분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예수는 자신을 따르고 자신께 오라고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답

복음서는 예수의 가르침을 한 문장으로 요약해 줍니다. 마가는 세례 요한이 잡힌 뒤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전하신 첫 말씀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왕국이 가까이 왔으니 너희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막 1:15

하나님의 나라는 지도 위의 장소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왕으로서 다스리시는 일이 사람들 가운데 시작되었다는 선언입니다. 구약이 오래 기다려 온 약속이 이루어지는 때가 왔다는 소식이므로 "복음"이라 불립니다. 여기에 요구되는 응답은 둘입니다. 방향을 돌이키는 회개와, 이 소식을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은 먼 곳의 권력자가 아니라 아버지이십니다. 제자들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하자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식으로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겨지게 하옵시며 아버지의 왕국이 임하옵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 6:9-10

기도의 첫머리가 "나의"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라는 점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일은 처음부터 공동체의 일입니다. 또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용서를 받은 사람이 남을 용서해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마 6:14-15).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산상 설교로 알려진 마태복음 5-7장에 가장 길게 담겨 있습니다. 그 시작은 의외입니다. 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영이 가난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하늘의 왕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요" 하셨습니다 (마 5:3). 예수께서는 율법이나 선지자를 "내가 율법이나 대언자들의 글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나는 폐하러 오지 아니하고 성취하러 왔노라." 하셨습니다 (마 5:17). 그리고 계명의 겉모양이 아니라 그 속뜻을 요구하셨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형제에게 품는 노여움까지 다룹니다. 이 대목에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까닭 없이 자기 형제에게 화를 내는 자는 심판의 위험에 처하게 되고 누구든지 자기 형제에게, 라가, 하고 말하는 자는 공회의 위험에 처하게 되거니와 누구든지, 너 어리석은 자여, 하고 말하는 자는 지옥 불의 위험에 처하게 되리라."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마 5:22). 가장 어려운 가르침은 이것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들을 사랑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며 악의를 품고 너희를 다루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

마 5:44

이 모든 가르침을 한데 묶는 질문을 한 율법사가 던졌을 때, 예수의 대답은 분명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첫째가는 큰 명령이요, 둘째 명령은 그것과 같은 것으로서, 너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이니라. 모든 율법과 대언자들의 글이 이 두 명령에 매달려 있느니라, 하시니라.

마 22:37-40

예수는 이 가르침이 말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산상 설교의 끝에서 그분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마 7:24).

그런데 복음서를 읽으면 사람들이 놀란 것은 내용만이 아니었습니다. 말씀하시는 방식이 달랐습니다.

그들이 그분의 교리에 깜짝 놀라니 이는 그분께서 권위를 가진 자로서 그들을 가르치시고 서기관들같이 하지 아니하셨기 때문이더라.

막 1:22

서기관들은 전해 받은 해석을 인용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이르노니"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가르침의 중심에는 언제나 그분 자신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온전한 자들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으나 병든 자들에게는 필요하니 나는 의로운 자들을 부르러 오지 아니하고 죄인들을 불러 회개하게 하려고 왔노라, 하시니라.

막 2:17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모든 자들아, 너희는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마 11:28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오지 못하느니라.

요 14:6

다른 스승들은 "이 길을 걸으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내게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이 점이 그분의 가르침의 가장 특이한 부분입니다.

교회의 증언

교회는 처음부터 예수의 가르침과 예수 자신을 나누지 않았습니다. 마가복음 1장 22절의 "권세"에 대해 베다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서기관들은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기록된 것을 백성에게 가르쳤으나, 예수께서는 모세의 하나님이시며 주로서 자기 뜻의 자유로 율법에 부족해 보이는 것을 더하시거나 백성에게 전파하시면서 어떤 것들을 바꾸셨습니다.

베다

여기서 베다는 "더하시거나 바꾸셨다"고 말합니다. 후대의 많은 신학자는 마태복음 5장 17절을 따라 예수께서 율법을 바꾸신 것이 아니라 그 본뜻을 드러내고 이루셨다고 풀이합니다. 해석은 갈리지만 모두 같은 것을 봅니다. 율법을 이렇게 다룰 수 있는 분은 율법의 주인이시라는 것입니다.

회개와 믿음에 대해 매튜 헨리는 마가복음 1장 15절을 풀면서 이렇게 씁니다. "회개로써 우리는 우리가 거역한 창조주께 영광을 돌리며, 믿음으로써 우리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구속자께 영광을 돌립니다" 매튜 헨리. 그는 이어서 그리스도께서 이 둘을 함께 묶으셨으니 아무도 갈라놓지 말라고 합니다.

사랑의 계명에 대해서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이웃의 범위를 이렇게 풀이합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우리 이웃이 우리의 긍휼의 도움을 필요로 하게 될 때 서 있는 모든 사람"임을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말씀이 이 풀이에서 나옵니다.

마태복음 22장 37-40절에 대해 매튜 헨리는 이렇게 기도하듯 마무리합니다. "이 두 계명으로 우리의 마음이 틀에 찍어 내듯 형성되기를 바랍니다" 매튜 헨리. 예수의 가르침은 알고 끝나는 지식이 아니라 마음을 빚는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원어로 보기

예수께서 가장 자주 쓰신 말은 바실레이아(βασιλεία), "나라"입니다. 이 말은 영토보다 "왕의 다스림"이라는 뜻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는 말은 어느 장소가 가깝다는 뜻이 아니라, 왕이신 하나님이 다스리러 오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마태복음은 주로 "천국"이라고 쓰는데, 하나님을 직접 부르기를 삼가는 유대인의 관습을 따른 것으로 흔히 풀이됩니다. 두 표현은 같은 것을 가리킵니다.

다음은 마가복음 1장 22절의 "권세"에 해당하는 엑수시아(ἐξουσία)입니다. 이 말은 힘(능력)이 아니라 권한, 곧 말하고 명령할 자격을 뜻합니다. 사람들은 예수의 말이 강해서가 아니라 그분이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는 분처럼 말씀하셔서 놀랐습니다.

"회개"로 옮긴 메타노이아(μετάνοια)는 글자 그대로 "마음을 바꿈"입니다. 후회의 감정만이 아니라 생각과 삶의 방향이 바뀌는 것입니다.

흔한 반론과 답

"예수는 훌륭한 도덕 교사였을 뿐이다. 그의 윤리는 받아들이되 신성에 관한 주장은 빼면 된다." 이 반론은 가볍지 않습니다. 산상 설교는 신앙이 없는 사람에게도 깊은 감동을 주었고, 그 윤리는 종교와 상관없이 읽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복음서의 가르침에서 자기 주장만 걷어 내기는 쉽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며 율법 위에 서서 말씀하셨고, 죄를 용서하셨고, 사람들에게 자신을 따르라고 부르셨습니다. 이 점에서 C. S. 루이스는 이런 주장들 때문에 예수를 그저 훌륭한 교사로만 보는 판단은 성립하기 어렵다고 논했습니다 C. S.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 물론 이 논증에는 반론도 있습니다. 후대 교회가 예수의 말씀을 가공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가리키는 말씀은 복음서의 가장 이른 층에도 퍼져 있다고 많은 학자는 봅니다.

"산상 설교는 사람이 지킬 수 없는 요구다." 맞는 말입니다. 형제에게 노하는 것까지 심판 아래 둔다면, 누가 흠 없이 설 수 있겠습니까? 이 점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다르게 답해 왔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 요구가 우리의 무능을 드러내어 우리를 은혜로 이끈다고 이해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이 성령의 능력으로 걷게 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의 모습이라고 이해합니다. 또 맹세나 폭력에 관한 말씀을 얼마나 문자 그대로 따를지에 대해서도 교회 안에서 견해가 갈립니다. 다만 모두가 인정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 요구를 수고하는 사람을 정죄하려고 하신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같은 입으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모든 자들아, 너희는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하셨습니다 (마 11:28).

"예수는 사랑만 가르쳤다. 심판이나 지옥은 교회가 덧붙인 것이다." 사랑이 그분 가르침의 중심이라는 말은 옳습니다. 그러나 복음서의 예수는 심판에 관해서도 자주, 진지하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 22절에서도 "지옥 불"이 나옵니다. 사랑하시는 분이 심판을 말씀하시는 것은 모순이 아닙니다. 악이 정말 악이고 사람이 정말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지옥이 어떤 모습인지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견해가 나뉘므로 이곳에서 다룰 수 없지만, 심판이 예수의 가르침 속에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사랑만 남기고 나머지를 지운 예수는 복음서의 예수가 아닙니다.

더 생각해 보기

예수의 가르침은 그분의 사람됨에서 떼어 낼 수 없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새로운 규칙의 목록을 주시기 전에 한 가지를 먼저 요구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다는 소식을 믿고 그분께 오라는 것입니다. 윤리는 그 초대 뒤에 따라오는 삶의 모습입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산상 설교에서 나를 가장 불편하게 하는 말씀은 무엇이며, 그것은 무엇을 가리키고 있습니까? 나는 예수를 훌륭한 스승으로 존경하는 데서 멈추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다"는 말이 오늘 내 하루에는 어떤 뜻이 될 수 있습니까?

더 읽으려면 예수는 누구인가?와 복음이란 무엇인가?를 보십시오. 마태복음 5-7장을 한자리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천천히 읽어 보는 것도 좋은 시작입니다.

출처

  1. C. S.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 2.3 — 예수에 대한 세 갈래 선택(거짓말쟁이, 미치광이, 주님).

성경과 고전 주석을 바탕으로, 역사적 기독교 신앙(사도신경, 니케아 신경)의 관점에서 쓴 글입니다. 그리스도인 사이에 견해가 갈리는 문제는 여러 견해를 함께 소개합니다. 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