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Theology
신학은 하나님이 알려 주신 계시, 특히 성경을 근거로 하나님과 그분이 지으시고 구원하시는 모든 것을 생각하고 정리하여 말하는 일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더 깊이 알기를 구하는 일이므로 학자만이 아니라 모든 신자의 일이며, 바른 신학은 예배와 삶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에 대한 말
‘신학’으로 옮기는 ‘테올로기아’(theologia)는 하나님을 뜻하는 테오스(θεός)와 말을 뜻하는 로고스가 합쳐진 말로, 글자 그대로는 ‘하나님에 대한 말’입니다. 이 낱말은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그것이 가리키는 일은 성경 전체가 우리를 부르는 일입니다.
영생은 이것이니 곧 그들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인 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 17:3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구절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라면, 이 지식에서 우리가 나아갈수록 영생에서도 나아가는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은 사람이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지어내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하신 것을 듣고 정리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데까지 가고 거기서 멈춥니다 (신 29:29). 11세기의 안셀무스는 이 일을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이라고 불렀습니다 안셀무스, 프로슬로기온. 믿지 않던 사람이 증거를 모아 하나님을 판단하는 일이 아니라, 믿는 사람이 하나님이 알려 주신 것을 더 깊이 깨닫고자 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신학은 목회자나 학자만의 일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모든 신자에게 "오직 너희 마음속에서 주 하나님을 거룩히 구별하고 너희에게 너희 속에 있는 소망의 이유를 묻는 모든 사람에게 온유함과 두려움으로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며"라고 말합니다 (벧전 3:15). 하나님을 생각하는 모든 사람은 이미 신학을 하고 있고, 물음은 그것을 참되게 하느냐입니다. 바울은 "이제 우상들에게 바친 것들에 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로 아나니 지식은 우쭐대게 하나 사랑은 세워 주느니라."라고 경고합니다 (고전 8:1). 로마서 9–11장의 깊은 논증을 마친 그가 "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분의 판단들은 헤아릴 수 없으며 그분의 길들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라는 찬양으로 끝맺듯 (롬 11:33), 바른 신학은 예배로 끝납니다.
교회가 걸어온 길
4세기 콘스탄티노플에서 삼위일체에 관한 설교를 남긴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는 동방 교회에서 ‘신학자’라는 이름으로 기억됩니다. 신학이 대학의 학문으로 자리 잡은 것은 12–13세기 무렵이며,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나님이 계시하신 것에 근거한 거룩한 가르침을 하나의 학문으로 설명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성경이 주로 가르치는 두 가지를 이렇게 요약하는데, 이것은 신학이 다루는 큰 두 주제이기도 합니다.
성경은 사람이 하나님에 관하여 무엇을 믿어야 하며,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어떤 의무를 요구하시는지를 주로 가르칩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3문
오늘날 신학은 흔히 몇 갈래로 나뉩니다. 성경의 각 부분과 그 흐름을 따라가는 성경신학,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주제별로 정리하는 조직신학, 교회가 생각해 온 역사를 살피는 역사신학, 설교와 예배와 목회에 적용하는 실천신학입니다.
서로 다르게 말하는 곳
전통마다 신학의 강조점이 다릅니다. 가톨릭 신학은 토마스 아퀴나스를 따라 믿음과 이성의 조화를 중시하고 교회의 가르치는 직무 안에서 신학을 합니다. 정교회는 신학을 기도와 예배에서 떼어 놓지 않으며, 신학자는 참되게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옛 수도사의 말이 전해져 옵니다. 종교개혁에서 나온 교회들은 성경을 모든 신학의 최종 규범으로 삼고, 전통과 이성과 경험을 그 아래에서 씁니다. 19세기의 슐라이어마허는 교리를 경건한 의식을 서술한 것으로 보아 근대 자유주의 신학의 길을 열었지만 슐라이어마허, 기독교 신앙, 복음주의 신학은 사람의 종교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고백합니다. 신학 과정의 신학이란 무엇인가 과와 신학의 원천 과도 읽어 보십시오.
출처
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