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예수는 메시아인가?

짧은 답

메시야와 그리스도는 같은 말로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뜻이며,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가 바로 약속된 그분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사도들은 이사야 53장, 미가 5:2, 시편 22편과 110편 같은 본문에서 그 근거를 찾았습니다. 유대인 편의 반론, 특히 세상에 아직 평화가 오지 않았다는 문제는 가볍지 않으며, 그리스도인은 이를 두 번의 오심으로 답합니다.

성경의 답

"메시야"는 히브리어 마시아흐에서 왔고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그리스어로는 크리스토스, 우리말로는 "그리스도"입니다. 둘은 같은 말입니다. 요한복음은 이 점을 풀이해 줍니다. 안드레가 형제 시몬에게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말하자 "그가 먼저 자기 형제 시몬을 찾아내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 하니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는 설명이 붙습니다 (요 1:41).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는 성을 붙인 이름이 아니라 "예수는 메시야이시다"라는 고백입니다.

구약에서 기름 부음은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를 하나님의 일을 위해 따로 세울 때 하던 일이었습니다. 그러다 다윗에게 영원한 왕위가 약속되고 (삼하 7:12-13), 선지자들이 장차 오실 이상적인 왕을 말하면서 "기름 부음 받은 그분"에 대한 기다림이 자랐습니다. 예수 시대에 유대인들의 기대는 한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다윗 같은 왕을 기다리는 이도 있었고, 로마를 몰아낼 사람을 기다리는 이도 있었습니다.

복음서의 전환점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나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니 베드로가 그분께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막 8:29

마태는 이 고백을 이렇게 전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하매

마 16:16

그런데 예수께서는 곧 그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말라고 경계하시고, 자신이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한다고 가르치기 시작하십니다 (막 8:30-31). 베드로는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그에게 메시야는 고난받는 분이 아니라 이기는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라는 말을 조심하셨던 것은 그 말이 정치적 해방자를 뜻하는 것으로 들릴까 염려하셨기 때문이라고 많은 해석자는 봅니다.

부활하신 예수는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를 만나 같은 문제를 풀어 주십니다.

이에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오 어리석고 대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일들로 고난을 당하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함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시고 모세와 모든 대언자들의 글에서 시작하여 모든 성경 기록들에서 자기에 관한 것들을 그들에게 풀어 설명해 주시니라.

눅 24:25-27

사도들은 이 풀이를 이어받았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의 회당에서 세 안식일 동안 성경을 가지고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고난을 받고 죽은 자들로부터 다시 일어났어야 함을 설명하고 주장하며 또 내가 너희에게 선포하는 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시라 하니"을 증명했다고 누가는 전합니다 (행 17:2-3). 그 가운데 두드러진 본문이 넷 있습니다.

이사야 53장. 고난받는 종을 이렇게 그립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의 범법들로 인해 부상을 당하고 우리의 불법들로 인해 상하였노라. 그가 징벌을 받음으로 우리가 화평을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도다.

사 53:5

미가 5:2. 메시야가 나실 곳을 베들레헴으로 가리킵니다.

그러나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네가 유다의 수천 가운데서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에서 치리자가 될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아오리라. 그의 나아감은 옛적부터 있었으며 영원부터 있었느니라.

미 5:2

헤롯이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고 물었을 때 서기관들이 바로 이 구절을 인용했다고 마태는 기록합니다 (마 2:4-6).

시편 22편. 버림받은 의인의 부르짖음은 십자가 위의 예수의 말씀과 겹칩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하여 나를 돕는 일로부터 또 나의 울부짖는 말로부터 멀리 떨어져 계시나이까?

시 22:1

시편 110편. 예수께서 직접 이 시편으로 바리새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불렀다면 그는 다윗의 자손일 뿐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 22:41-45).

주께서 내 주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을 네 발받침으로 삼을 때까지 너는 내 오른편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

시 110:1

교회의 증언

사도신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외아들, 우리 주로 고백하며, 니케아 신경도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합니다 사도신경 니케아 신경. 교회는 처음부터 "그리스도"라는 말을 예수의 이름 속에 넣어 불러 왔고, 이는 예수가 약속된 메시야라는 고백이 곧 신앙의 시작이었음을 보여 줍니다.

교부들은 베드로의 고백이 어디에서 나왔는지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베다는 예수께서 먼저 사람들의 의견을 물으신 까닭을 이렇게 풀이합니다. "그들의 고백이 일반의 의견에 근거한 것처럼 보이지 않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베다 제자들의 고백은 세상 사람들의 평판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 믿음에서 나온 것이어야 했다는 말입니다.

매튜 헨리는 엠마오 길의 가르침에서 구약 전체의 결을 봅니다. "복음 은혜의 금실이 구약의 온 직물을 관통하여 흐르고 있습니다." 매튜 헨리 그는 또 미가 5:2를 두고 "이것은 아마도 구약에서 가장 중요한 단일 예언일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매튜 헨리.

원어로 보기

마시아흐(מָשִׁיחַ)는 "기름을 바른 자"라는 뜻입니다. 구약에서 이 말은 왕에게 가장 자주 쓰였고, 제사장에게도, 심지어 이방 왕 고레스에게도 쓰였습니다. 그러므로 "메시야"라는 말 자체가 한 사람을 가리키는 고유한 호칭으로만 쓰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많은 학자는 시간이 지나면서, 특히 포로기 이후에 이 말이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마지막 왕을 가리키는 말로 굳어졌다고 봅니다. 신약 시대에 그 헬라어 형태가 메시아스(Μεσσίας)이고, 이것을 번역한 낱말이 크리스토스(Χριστός)입니다. 그리스어 구약(칠십인역)도 마시아흐를 크리스토스로 옮겼습니다.

기름 부음은 직책으로의 임명입니다. 예수께서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 61장을 읽으신 뒤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고 하신 것은 자신이 기름 부음을 받은 분이라는 선언이었습니다 (눅 4:18-21).

흔한 반론과 답

"메시야가 오면 세상에 평화가 올 텐데, 지금도 전쟁과 악이 있다." 이것은 많은 유대인이 예수를 메시야로 받아들이지 않는 주된 이유 가운데 하나이며, 무게 있는 반론입니다. 이사야는 메시야 시대를 이렇게 그렸습니다. "그가 민족들 가운데서 심판하며 많은 백성들을 꾸짖으리니 그들이 자기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자기들의 창을 쳐서 가지 치는 낫을 만들리라. 민족이 민족을 치려고 칼을 들지 아니하고 그들이 다시는 전쟁을 배우지 아니하리라." (사 2:4). 예수 이후에도 이 일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답은 메시야가 두 번 오신다는 것입니다. 첫 번째 오심은 고난받는 종으로서 죄를 담당하시기 위한 것이었고, 두 번째 오심은 왕으로서 심판하시고 세상을 새롭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많은 사람의 죄들을 담당하시려고 단 한 번 드려지셨으며 또 자신을 기다리는 자들에게 죄와 상관없이 두 번째 나타나사 구원에 이르게 하시리라." (히 9:28). 예수의 제자들도 부활 후에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고 물었고, 예수는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 있다고 답하셨습니다 (행 1:6-7). 이 답에 설득되지 않는 사람이 있는 것은 이해할 만합니다. 두 번 오시는 메시야는 구약 본문만 보아서는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말할 수 있는 것은, 예수의 오심이 나라의 시작이었고 그 완성을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도 아직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고난받고 죽는 메시야는 모순이다. 이사야 53장의 종도 이스라엘을 가리킨다." 십자가에 달린 사람은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로 여겨질 수 있었으며 (신 21:23), 바울도 십자가의 그리스도가 유대인에게 걸림돌이라고 인정합니다(고전 1:23). 또 이사야 53장의 종이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킨다는 해석은 오랜 유대 전통에 속합니다. 이 점은 존중해야 합니다. 다만 고대의 아람어 이사야 번역(탈굼)은 이 종을 메시야라고 부르면서도 고난은 대부분 다른 이들에게 돌려 읽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본문에서 한 개인이 다른 사람들의 죄를 지는 모습을 읽습니다. 예수께서 직접 말씀하셨듯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영광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줄거리라면 (눅 24:26), 십자가는 메시야 됨을 부정하는 사건이 아니라 그 방식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뒷받침하는 것이 부활이라고 사도들은 선포했습니다 (행 2:36).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의 삶을 예언에 맞추어 꾸며 낸 것이다." 이것도 진지한 반론입니다. 일부 인용은 원래 문맥에서 다른 사건을 가리켰고, 복음서 기자들이 그것을 예수께 적용해 읽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몇 가지를 구분해야 합니다. 어떤 일은 꾸며 낼 수 없는 일입니다. 예컨대 메시야가 처형당하는 것은 제자들이 만들고 싶어 했을 이야기가 아니었고, 실제로 베드로는 그 말을 거부했습니다. 또 복음서는 예수께서 직접 성경으로 자기의 사명을 설명하셨다고 전하며, 제자들이 예언을 읽는 방식도 거기서 왔다고 이해합니다. 결정적인 것은 구절 하나하나가 아니라 전체의 무늬입니다. 왕, 종, 제사장, 고난받는 의인의 모습이 한 사람 안에서 만난다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이루어짐"입니다. 정직하게 말하면 이것은 한 구절로 하는 논리 증명이 아니라, 성경 전체의 이야기를 어떻게 읽느냐의 문제입니다.

더 생각해 보기

그리스도인은 예수가 메시야라는 사실을 유대인의 역사와 떼어서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는 유대인이었고, 그리스도인은 이스라엘의 성경 위에 서 있습니다. 교회가 오랜 세월 유대인들을 멸시하고 박해하기도 했던 것은 부끄러운 일이며, 이 주제에 대한 대화는 겸손하고 서로를 존중하는 가운데 이루어져야 합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나는 어떤 메시야를 기대하고 있는가? 문제를 즉시 해결해 주는 분인가, 아니면 고난 속에서 함께하며 끝내 승리하시는 분인가? 베드로처럼 예수를 올바르게 부르면서도 그분의 길은 받아들이기 어려워한 적은 없는가? 요한은 이 책을 쓴 목적을 이렇게 밝힙니다. "이것들을 기록함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믿고 그분의 이름을 통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 20:31).

더 읽으려면 예수는 누구인가?, 성경의 예언은 이루어졌는가?, 예수는 다시 오시는가?를 보십시오. 이사야 52:13-53:12을 소리 내어 천천히 읽어 보는 것도 좋은 출발입니다.

출처

  1. 고대 교회, 사도신경 — 로마 교회의 세례 신앙고백에서 자란 서방 교회의 기본 신조. 읽기
  2. 니케아·콘스탄티노플 공의회, 니케아 신경 325/381 — 동서방 교회가 함께 고백하는 신조. 읽기

성경과 고전 주석을 바탕으로, 역사적 기독교 신앙(사도신경, 니케아 신경)의 관점에서 쓴 글입니다. 그리스도인 사이에 견해가 갈리는 문제는 여러 견해를 함께 소개합니다. 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