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기적은 가능한가?

짧은 답

하나님이 계시고 그분이 자연을 만드셨다면, 그분이 자연 안에서 특별하게 일하시는 것은 모순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적을 자연법칙을 깨뜨리는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가리키는 표적으로 읽습니다. 흄의 반론은 진지하게 받을 만하지만, 그 힘은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전제를 얼마나 미리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성경의 답

기적이 가능하냐는 질문은 먼저 "기적이 무엇이냐"는 질문입니다. 성경은 기적을 단순히 신기한 구경거리로 보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행하신 일을 "표적"이라고 부릅니다. 표적은 어딘가를 가리키는 이정표입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이 포도주가 된 일을 요한은 이렇게 적습니다.

예수님께서 기적들 중의 이 처음 기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사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그분을 믿으니라.

요 2:11

이적의 목적은 놀라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하신 분의 영광을 나타내어 믿음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요한은 책을 맺으면서 자기가 이적을 기록한 이유를 직접 밝힙니다.

진실로 예수님께서 자기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표적들도 많이 행하셨으나 이것들을 기록함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믿고 그분의 이름을 통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 20:30-31

또 하나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닫힌 기계 같은 세계 바깥에서 가끔 손을 대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연은 처음부터 하나님이 지으셨고 지금도 그분이 붙드십니다. 바울은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되었다고 말한 뒤 이렇게 덧붙입니다.

또 그분께서는 모든 것보다 먼저 계시고 모든 것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하느니라.

골 1:17

해가 뜨는 일도, 아기가 태어나는 일도 성경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의 꾸준한 돌보심입니다. 그렇다면 이적은 평소에는 규칙적으로 일하시던 같은 분이 다른 방식으로 일하시는 경우입니다. 예수께서는 귀신을 쫓아내시며 그 뜻을 설명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다는 표시라는 것입니다 (눅 11:20). 이적은 닫힌 체계에 구멍을 내는 사건이 아니라, 왕이 오셨다는 소식을 눈에 보이게 하는 일입니다.

성경은 이적이 아무 때나 요구에 따라 일어난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표적을 보여 달라고 하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그분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대언자 요나의 표적 외에는 아무 표적도 그 세대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마 12:39

그 "요나의 표적"은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처럼 인자도 땅속에 있으리라는 말씀, 곧 죽음과 부활을 가리킵니다 (마 12:40).

교회의 증언

교회는 기적을 믿으면서도 아무것이나 믿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매튜 헨리는 마태복음 12장을 풀이하면서 중요한 구별을 짚습니다. 그는 "표적은 아브라함과 기드온처럼 믿음을 굳게 하려고 구한 이들에게는 주어졌지만, 자기의 불신앙을 변명하려고 요구한 이들에게는 거절되었습니다"라고 씁니다 매튜 헨리. 믿고 싶어서 구하는 정직한 질문은 받아들여지고, 믿지 않을 구실을 얻으려는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히에로니무스는 같은 장면에서 서기관들의 요구가 얼마나 이상한지를 지적합니다. 그는 "그들은 마치 자기들이 본 것이 표적이 아닌 것처럼 그분께 표적을 요구합니다"라고 말합니다 히에로니무스. 이미 많은 것을 보고도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를 더 보아도 마찬가지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비유 속의 아브라함의 입을 빌려 하신 말씀도 같은 뜻입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귀 기울이지 않는 사람은 죽은 자가 살아나도 권함을 받지 않으리라는 것입니다 (눅 16:31).

크리소스토무스는 가나의 이적에서 주님이 일부러 이미 있는 재료를 쓰셨다는 점을 눈여겨봅니다. 그는 왜 항아리를 채우기 전에, 곧 무에서 포도주를 만드는 이적을 행하지 않으셨느냐고 묻습니다. 그리고 있는 물질을 바꾸는 일과 무에서 만드는 일을 견주어 이렇게 답합니다. "후자의 이적이 더 놀라웠겠지만 전자가 더 믿기 쉬웠을 것입니다" 크리소스토무스. 하나님은 사람을 압도하기보다 믿을 수 있는 방식으로 일하신다는 뜻입니다.

기적과 자연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이 자주 인용됩니다. 그는 『신국론』에서 기적이 자연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는 자연에 어긋나는 것이라는 취지로 말했습니다. 자연의 참된 주인은 하나님이시므로, 우리가 아는 규칙이 하나님의 일하심의 전부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원어로 보기

요한이 이적을 부를 때 즐겨 쓰는 말은 세메이온(σημεῖον), "표적"입니다. 이 말은 그 일 자체보다 그것이 가리키는 의미에 무게를 둡니다. 요한복음에는 표적이 일곱 가지쯤 있고, 모두 예수께서 누구신지를 보이는 데 쓰입니다. 표적을 보고도 그 가리키는 곳을 보지 못하면 손가락 끝만 보는 셈입니다.

사도행전 2:22에서 베드로는 예수를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통해 하나님이 증거하신 분이라고 소개합니다. 여기에는 세 단어가 겹쳐 있습니다. 두나미스(δύναμις)는 능력이나 능한 일이고, 테라스(τέρας)는 사람을 놀라게 하는 기사이며, 세메이온은 가리키는 표적입니다. 같은 사건이 능력의 일이고, 놀라운 일이며, 동시에 의미를 지닌 일이라는 뜻입니다. 신약에서 테라스는 거의 언제나 표적과 짝을 이루고 홀로 쓰이지 않습니다. 놀라움 자체가 아니라 놀라움이 향한 의미가 중요하다는 증거로 읽을 수 있습니다.

흔한 반론과 답

"기적은 자연법칙의 위반이고, 자연법칙은 한결같은 경험으로 확립되었다. 그러니 기적이 일어났다기보다 증언이 틀렸을 가능성이 언제나 더 크다." 이것은 18세기 철학자 데이비드 흄이 『인간 지성에 관한 탐구』에서 편 논증의 요지입니다 흄, 기적에 관하여. 흄은 기적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증명하려 했다기보다, 사람의 증언만으로는 기적을 믿을 충분한 근거가 되기 어렵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반론에는 옳은 점이 있습니다. 사람은 잘못 보고, 부풀려 전하고, 속기도 합니다. 종교마다 기적 이야기가 있으며 모두 사실일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그 점에서는 흄의 경고를 받아들일 수 있고, 실제로 교회는 늘 기적 주장을 가려 보려고 애써 왔습니다.

그러나 이 논증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첫째, "자연법칙은 한 번도 깨진 적이 없다"는 경험이 기적을 막는 증거가 되려면 이미 기적이 일어난 적이 없다고 전제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따져 보려던 문제입니다. 많은 철학자가 흄의 논증이 이런 순환에 빠질 위험이 있다고 지적해 왔습니다. 둘째, 자연법칙은 아무 간섭이 없을 때 일어나는 일을 서술하는 것이지, 간섭이 없다는 것을 보증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구공의 운동법칙은 누가 공을 들어 치울 수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셋째, 기적이 일어날 가능성의 크기는 하나님이 계신지에 따라 달라집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그분이 세상을 지으셨다면, 그분이 특별한 목적을 위해 특별하게 일하시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결국 기적을 판단하는 기준은 증언의 질뿐 아니라 우리가 어떤 세계관에서 출발하느냐와도 맞닿아 있습니다.

"기적이 정말 있다면 왜 지금은 눈에 띄지 않는가? 왜 하나님은 모두가 보게 하지 않으시는가?" 이것도 정직한 질문입니다. 성경 자체가 이적이 늘 일어나지는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이적은 모세와 출애굽 때, 엘리야와 엘리사 때,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때처럼 하나님이 구원의 역사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하신 시기에 몰려 있습니다. 그것도 요구에 응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였습니다. 예수께서도 고향에서는 사람들의 믿지 않음 때문에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마 13:58). 많은 신자는 이것을 그분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이적이 신뢰 속에서 이루어지는 관계의 일이기 때문이라고 읽습니다. 오늘날에도 이적이 일어난다고 믿는 그리스도인이 많지만, 그것이 얼마나 자주, 어떤 형태로 일어나는지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도 견해가 갈립니다. 모든 신자가 같은 말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기적의 시금석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을 시금석으로 삼습니다. 예수께서 스스로 "요나의 표적"이라고 부르신 것이 바로 그 사건입니다. 다른 기적 이야기는 아직 믿지 못하더라도, 이 한 사건의 증거를 정직하게 살피는 것이 가장 좋은 출발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예수는 정말 부활했는가?에서 더 자세히 다룹니다. 부활이 사실이라면 다른 이적들은 더 이상 불가능한 것이 아니고,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기독교의 나머지 이적들도 힘을 잃습니다.

더 생각해 보기

기적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이 멋대로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계가 질서 있는 것은 그것을 지으신 분이 신실하시기 때문이고, 그 신실하신 분이 필요하면 자기 방식으로 일하실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또한 기적을 본다고 해서 저절로 믿음이 생기지는 않는다는 점도 기억할 만합니다. 믿음은 놀라움에서 시작하기보다 신뢰에서 자랍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나는 "기적은 있을 수 없다"는 말을 증거에서 이끌어 냈습니까, 아니면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전제입니까? 하나님이 계신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리라고 기대하는 것이 합리적일까요? 내가 구하는 표적은 믿기 위한 것입니까, 믿지 않을 이유를 확인하기 위한 것입니까?

더 읽으려면 예수는 정말 부활했는가?, 예수는 왜 기적을 행하셨는가?, 과학과 신앙은 충돌하는가?를 보십시오.

출처

  1. 데이비드 흄, 인간 지성에 관한 탐구 10장 / Section 10 (1748) — 기적에 대한 증언을 믿을 수 없다는 고전적 논증.

성경과 고전 주석을 바탕으로, 역사적 기독교 신앙(사도신경, 니케아 신경)의 관점에서 쓴 글입니다. 그리스도인 사이에 견해가 갈리는 문제는 여러 견해를 함께 소개합니다. 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