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란 무엇인가?
성경에서 진리는 먼저 믿을 수 있고 신실한 것을 가리키며, 신약은 그 진리가 한 사람,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났다고 말합니다. 진리가 있다는 것과 우리가 그것을 모두 안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이므로, 그리스도인은 진리를 말하되 사랑과 겸손으로 말하도록 부름받습니다.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는 주장도 진지하게 들을 만하지만, 예외 없이 말하면 스스로를 무너뜨립니다.
성경의 답
"진리가 무엇이냐"는 질문은 요한복음이 절정으로 향하는 자리에서 던져집니다. 로마 총독 빌라도 앞에 예수께서 서 계신 장면입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하신 뒤, 왜 이 땅에 오셨는지를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빌라도가 그분께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냐? 하니 예수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왕이라고 네가 말하는도다. 내가 이런 목적으로 태어났으며 이런 까닭으로 세상에 왔나니 곧 나는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하노라. 진리에 속한 자마다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시매
요 18:37
빌라도의 대답은 짧습니다.
빌라도가 그분께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그가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로 나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잘못도 찾지 못하노라.
요 18:38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밖으로 나갑니다. 이것이 냉소였는지, 지친 관리의 한숨이었는지, 진짜 질문이었는지는 본문만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요한이 이 장면을 일부러 놓아두었다는 점입니다. 진리가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 앞에, 요한이 보기에 진리 자신이 서 계십니다.
요한복음은 이 점을 처음부터 말해 왔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고, 그분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하신 분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하셨습니다 (요 1:14). 그리고 최후의 밤에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오지 못하느니라.
요 14:6
진리가 한 사람이라는 말은, 진리가 단지 옳은 문장들의 모음이 아니라 신실하게 만나고 따를 수 있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예수께서는 진리가 자유와 이어진다고도 하셨습니다. "또 너희가 진리를 알리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하시니라." (요 8:32). 그분은 아버지께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진리로 그들을 거룩히 구별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이니이다.
요 17:17
성령도 "진리의 성령"이라 불리며 제자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십니다 (요 16:13).
성경은 진리가 말과 삶에서 지켜져야 한다고도 말합니다. 거짓을 미워하시는 하나님은 진실하게 행하는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잠 12:22). 바울은 교회에 이렇게 씁니다.
그런즉 거짓말을 버리고 각 사람이 자기 이웃과 더불어 진리를 말하라. 우리는 서로 지체니라.
엡 4:25
같은 장에서 바울은 진리를 말하는 방식도 정합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며 모든 일에서 그분 안에 이르도록 성장하게 하려 함이라. 그분은 머리시니 곧 그리스도시니라." (엡 4:15). 진리를 말하는 일과 사랑하는 일은 둘로 나뉘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법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진리를 기뻐하며"합니다 (고전 13:6).
그런데 성경은 진리를 쥐고 있다고 큰소리치는 태도에도 조심스럽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지금은 거울을 통하여 희미하게 보나 그때에는 얼굴을 마주 대하여 보며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시는 것 같이 나도 알리라."이라고 말합니다 (고전 13:12). 또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그는 마땅히 알아야 할 바를 아직 전혀 알지 못하느니라."라고 경고합니다 (고전 8:2). 베뢰아 사람들은 바울의 말도 "이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던 자들보다 더 고귀하여 온전히 준비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들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 기록들을 탐구하므로"했고, 누가는 이를 칭찬합니다 (행 17:11). 그리고 믿음을 설명하는 일은 "오직 너희 마음속에서 주 하나님을 거룩히 구별하고 너희에게 너희 속에 있는 소망의 이유를 묻는 모든 사람에게 온유함과 두려움으로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며" 하라고 합니다 (벧전 3:15).
교회의 증언
교회는 진리를 사람이 소유하는 물건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여 왔습니다. 니케아 신경은 성자를 참 하나님에게서 나신 참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니케아 신경. 진리이신 분은 하나님에 대해 올바르게 말해 주는 교사일 뿐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시라는 고백입니다.
요한복음 14장을 풀이하면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길과 진리와 생명을 차례로 설명합니다. 그는 진리와 생명은 누구나 이해하지만 길을 찾은 사람은 많지 않다고 말하고, 이렇게 덧붙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진리와 생명이신 하나님의 말씀은 인성을 취하심으로 길이 되셨습니다. 그 사람을 통해 걸어가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 이를 것입니다. 잘못된 길을 아무리 힘차게 걷는 것보다 바른 길을 절뚝거리며 걷는 것이 낫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힐라리우스는 이 말씀이 주는 안심을 이렇게 풉니다. "진리이신 분은 거짓으로 우리를 속이시지 않으며" 힐라리우스. 진리를 믿는다는 것은 속임을 당하지 않으리라는 신뢰이기도 합니다.
매튜 헨리는 빌라도의 질문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빌라도는 좋은 질문을 하였으니, 「진리가 무엇이냐」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어서 이렇게 덧붙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 질문을 하면서도 진리를 구하는 일에 끝까지 견딜 인내가 없거나 그것을 받아들일 겸손이 부족합니다" 매튜 헨리. 질문이 좋다는 인정과, 질문만으로는 끝나지 않는다는 지적이 함께 있습니다.
원어로 보기
신약의 "진리"는 알레테이아(ἀλήθεια)입니다. 이 말은 흔히 부정의 접두어와 "감추어지다"(또는 "잊다")는 뜻의 뿌리가 합쳐진 말로 보아 "감추어지지 않은 것"이라고 풀이됩니다. 그러나 이 어원이 실제 쓰임에 얼마나 살아 있었는지는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있고, 어원만으로 뜻이 정해지지도 않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이 말은 사실과 일치함과 하나님의 신실함을 함께 담습니다. 요한복음 3:21에는 헬라어로 "진리를 행하는 자"라는 표현까지 나옵니다 (개역한글은 "진리를 쫓는 자"로 옮겼습니다) (요 3:21).
그 배경에는 히브리어 에메트(אֱמֶת)가 있습니다. 에메트는 "믿을 수 있음", "신실함"을 가리키며, "믿다"는 뜻의 동사 아만(אָמַן)과 같은 뿌리입니다. 우리가 기도의 끝에 말하는 "아멘"도 이 뿌리에서 나옵니다. 구약에서 진리는 먼저 기대어 설 수 있는 것, 곧 무너지지 않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진리이시라는 말은 그분이 믿을 만하시다는 말과 맞닿아 있습니다.
흔한 반론과 답
"진리는 상대적이다. 우리는 언어와 문화와 이해관계라는 안경을 벗고 세상을 볼 수 없으니, 각자에게 각자의 진리가 있을 뿐이다." 이 반론을 가볍게 여길 수 없습니다. 문화마다 옳다고 믿는 것이 다르고, 권력을 쥔 쪽이 자기 생각을 진리라고 불러 온 역사도 있습니다. 우리의 앎이 부분적이고 한 자리에서 바라본 것이라는 점은 성경도 인정합니다 (고전 13:12). 그러나 "모든 진리는 상대적이다"라고 예외 없이 말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이 문장 자신은 모든 사람에게 참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이 문장도 상대적이라면 말하는 사람에게만 참일 뿐, 다른 사람이 동의할 이유가 없습니다. 반면 "누구나 한 자리에서 본다"는 겸손한 주장은 스스로를 무너뜨리지 않으며, 그리스도인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다만 같은 산을 여러 자리에서 본다는 말은 산이 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의 시야를 고쳐 줄 수 있습니다. 맛이나 취향처럼 사람마다 다른 영역도 있지만, 성경이 말하는 것은 하나님과 세상과 우리 자신이 실제로 어떠한가 하는 물음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다 알지 못한다는 사실은 진리가 없다는 증거가 아니라, 진리가 우리보다 크다는 표시일 수 있습니다.
"자기가 진리를 안다고 주장하는 것은 오만하고 폭력으로 이어진다." 이것은 역사의 증언입니다. 교회가 진리의 이름으로 이견을 가진 사람을 박해하고 칼을 든 때가 있었다는 것은 부끄럽지만 사실입니다. 그 일은 예수께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하시며 힘으로 나라를 지키지 않으신 것(요 18:36)과 어긋납니다. 그리스도인이 말하는 진리는 "내가 옳다"가 아니라 "내가 받은 것"입니다. 진리가 한 분의 은혜로 주어진 것이라면 자랑할 근거는 없습니다. 또 바울은 거역하는 사람을 "온유함으로" 대하라고 합니다 (딤후 2:25). 진리를 말하되 사랑 안에서 말하라는 가르침을 어길 때, 그것은 진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한 것이 됩니다.
"그리스도인들끼리도 무엇이 진리인지 의견이 다르다." 맞습니다. 세례, 성찬, 예정, 종말 같은 문제에서 교회는 나뉘어 있고, 각자는 자기 입장이 성경에 맞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모든 불일치가 같은 무게를 지니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신경과 니케아 신경에 담긴 핵심, 곧 삼위일체 하나님과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신 그리스도,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은 거의 모든 시대와 지역의 교회가 함께 고백해 왔습니다. 나머지에 대해서는 서로의 입장을 가장 좋은 모습으로 듣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하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이 문제는 교회는 왜 이렇게 많이 나뉘었는가?에서 더 이야기합니다.
더 생각해 보기
"진리가 무엇이냐"는 오늘도 유효한 질문입니다. 성경은 이 질문에 정보가 아니라 한 사람의 얼굴로 대답합니다. 그리고 그 대답을 받은 사람은 진리를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진리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확신과 겸손이 함께 갈 수 있습니다. 그분이 진리이시므로 확신하고, 우리의 앎은 아직 거울로 보는 것 같으므로 겸손합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나는 진리를 알고 싶은 것입니까, 아니면 내 생각이 옳다는 확인을 받고 싶은 것입니까? 일상에서 작은 거짓을 쉽게 넘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틀렸다는 말을 들을 때 나는 어떻게 반응합니까?
더 읽으려면 예수만이 유일한 길인가?와 성경은 믿을 만한가?를 보십시오. 요한복음 18장 28절부터 19장 16절까지를 빌라도의 자리에 서서 천천히 읽어 보는 것도 좋은 출발입니다.
관련 질문
- 예수만이 유일한 길인가?그리스도인은 예수께서 하나님께로 가는 유일한 길이시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이 고백은 그리스도인이 다른 사람보다 낫다는 주장이 아니라, 구원이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한 분의 은혜에서 온다는 고백입니다.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이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도 여러 견해가 있습니다.
- 성경은 믿을 만한가?성경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말씀이며 목격자들의 증언에 기초한 책이라고 소개합니다. 필사본의 수와 이른 시기, 사해 사본 같은 발견은 오늘의 성경이 기록 당시의 본문을 매우 가깝게 전한다고 믿을 근거를 줍니다. 이것은 증명이 아니라 신뢰할 이유이며, 정직한 의문은 그 신뢰를 시험하는 일이 됩니다.
- 선과 악은 누가 정하는가?성경은 선의 기준이 사람들의 합의나 하나님의 기분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선하신 성품에 있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그 기준을 사람의 양심에 새기셨고, 율법으로 밝히셨으며, 사랑으로 요약하셨습니다. 도덕 감각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설명할 수 있다고 해서 그 도덕이 참인지 아닌지가 저절로 가려지는 것은 아니라고 그리스도인들은 봅니다.
- 의심해도 괜찮은가?성경은 의심하는 사람을 내치지 않습니다. 도마와 세례 요한과 시편 기자들은 정직하게 물었고, 하나님은 그들을 받아 주셨습니다. 다만 믿음을 포기하려는 마음으로 굳어진 불신앙과, 이해를 구하며 하나님께 묻는 의심은 다릅니다. 의심은 공동체와 말씀과 기도 안에서 인내하며 풀어 갈 수 있는 길입니다.
관련 주제
출처
- 니케아·콘스탄티노플 공의회, 니케아 신경 325/381 — 동서방 교회가 함께 고백하는 신조. 읽기
성경과 고전 주석을 바탕으로, 역사적 기독교 신앙(사도신경, 니케아 신경)의 관점에서 쓴 글입니다. 그리스도인 사이에 견해가 갈리는 문제는 여러 견해를 함께 소개합니다. 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