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선과 악은 누가 정하는가?

짧은 답

성경은 선의 기준이 사람들의 합의나 하나님의 기분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선하신 성품에 있다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그 기준을 사람의 양심에 새기셨고, 율법으로 밝히셨으며, 사랑으로 요약하셨습니다. 도덕 감각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설명할 수 있다고 해서 그 도덕이 참인지 아닌지가 저절로 가려지는 것은 아니라고 그리스도인들은 봅니다.

성경의 답

성경은 선과 악을 사람이 정한다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이 기분 내키는 대로 정하신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선의 기준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한 부자 청년이 예수께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르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 한 분 곧 하나님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막 10:18

시편 기자는 같은 사실을 기도로 고백합니다.

주는 선하시며 선을 행하시오니 주의 법규들을 내게 가르치소서.

시 119:68

하나님은 선하시기 때문에 선을 행하시고, 그분이 가르치시는 것도 그분의 선하심에서 나옵니다. 창조 이야기도 같은 방향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지으신 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자신이 만든 모든 것을 보시니, 보라, 매우 좋았더라. 그 저녁과 아침이 여섯째 날이더라."고 하십니다 (창 1:31). 좋음은 사람이 나중에 덧붙인 평가가 아니라 하나님이 세계에 심으신 질서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선악을 전혀 알 수 없을까요? 바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율법을 소유하지 않은 이방인들이 본성을 통해 율법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을 행할 때에 이런 사람들은 율법을 소유하지 않아도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롬 2:14

이런 사람들은 또한 자기 양심이 증언하며 자기 생각들이 서로 고소하고 변명하는 가운데 자기 마음속에 기록된 율법의 행위를 보이느니라.)

롬 2:15

기록된 율법을 받지 못한 사람들도 옳고 그름을 어렴풋이 압니다. 마음속에서 서로 고발하고 변호하는 소리가 들리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흔히 말하는 '도덕 논증'의 성경적 뿌리입니다. 우리가 모두 어떤 기준 앞에 서 있다고 느끼는 것은 그 기준을 새기신 분이 계시기 때문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이 소리는 흐려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그 첫머리는 명령보다 관계의 선언입니다. "나는 너를 이집트 땅 곧 속박의 집에서 데리고 나온 주 네 하나님이니라." (출 20:2). 이어서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 증거를 금합니다. 예수께서는 이 모든 율법을 두 가지로 묶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마음을 다하고 혼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

마 22:37

둘째 명령은 그것과 같은 것으로서, 너는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이니라.

마 22:39

바울도 같은 결론에 이릅니다. "사랑은 자기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롬 13:10). 선악의 기준은 차가운 규칙의 목록이 아니라, 사랑이신 하나님의 성품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요일 4:8).

교회의 증언

교회는 오래전부터 양심과 율법의 관계를 이렇게 이해해 왔습니다. 하나님은 십계명을 처음으로 새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이미 사람의 마음에 있던 것을 다시 밝히셨다는 것입니다. 매튜 헨리는 출애굽기 20장을 풀면서 이렇게 씁니다.

이 율법을 하나님께서는 전에도 사람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은 그의 마음에 기록되어 있었으나, 죄가 그것을 너무나 훼손하였으므로 그에 대한 지식을 되살릴 필요가 있었습니다.

매튜 헨리

로마서 2장에 대해서도 그는 "양심은 증인이며 조만간 증언할 것입니다"라고 씁니다 매튜 헨리. 양심은 실재하는 증인이지만, 죄로 훼손된 증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양심을 존중하면서도 양심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가르쳐 왔습니다.

철학에서는 이 문제가 고전적인 물음으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플라톤의 『에우티프론』은 경건한 것이 경건하기 때문에 신들의 사랑을 받는지, 신들의 사랑을 받기 때문에 경건한지를 묻습니다 플라톤, 에우티프론 10a. 오늘날 이 물음은 흔히 이렇게 바뀌어 쓰입니다. 선한 것은 하나님이 명하시기 때문에 선한가, 선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명하시는가? 앞의 것을 택하면 선은 신의 변덕이 되고, 뒤의 것을 택하면 선이 하나님보다 앞선 어떤 기준이 됩니다. 기독교 전통의 고전적 대답은 어느 쪽도 아닙니다. 선은 하나님 밖의 기준도 아니고 자의적인 결정도 아니며, 하나님의 변치 않는 본성 자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그 본성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거짓말을 명하실 수 없고, 잔혹함을 선이라 부르실 수 없습니다. 이 대답은 하나님이 선을 가지신 분이 아니라 선 자체이시라는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가르침에 뿌리를 둡니다. 다만 전통마다 강조점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뜻과 명령의 주권을 더 강조하는 흐름도 있고, 하나님이 지으신 본성 안의 질서를 더 강조하는 흐름도 있습니다. 그러나 선의 뿌리가 하나님이라는 점에서는 모두 같습니다.

원어로 보기

히브리어 토브(טוֹב)는 "좋다, 선하다"를 뜻하는 흔한 낱말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지으신 것을 보시고 "좋았더라"고 하실 때 쓰인 말이 바로 이것입니다. 미가 6:8은 같은 말로 이렇게 가르칩니다.

오 사람아, 그분께서 무엇이 선한 것인지 네게 보이셨나니 주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은 오직 의롭게 행하고 긍휼을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걷는 것이 아니냐?

미 6:8

여기서 선은 추상적인 이론이 아니라 공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하나님과 함께 걷는 삶입니다. 선은 하나님이 "보이신" 것이라는 점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알려진 것입니다.

신약에서 양심을 가리키는 쉬네이데시스(συνείδησις)는 "함께 안다"는 뜻의 낱말에서 왔습니다. 자기 자신과 함께 안다는 뜻이며,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우리를 아시는 하나님과 함께 아는 것으로 읽기도 합니다. 양심이 때로 우리를 고발하는 것은 우리 안에 자기 자신보다 더 높은 기준이 있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흔한 반론과 답

"도덕은 진화의 산물이다." 이 반론은 가볍지 않습니다. 협력하는 무리가 살아남기에 유리했으므로 우리가 도움을 주고 속임을 싫어하는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는 설명은 많은 과학자가 받아들입니다. 그리스도인 중에도 진화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으며, 이 글은 그 논쟁을 다루지 않습니다. 다만 도덕 감각이 어떻게 생겼는지와 그 도덕이 참인지는 서로 다른 질문입니다. 우리의 수학 능력도 생존에 도움이 되도록 생겼겠지만, 그렇다고 2+2=4가 틀린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어떤 감각이 생존에 유리했다고 해서 그것이 옳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도덕이 단지 우리를 살아남게 하는 감정일 뿐이라면 "노예제는 틀렸다"라는 말은 "나는 그것이 싫다"는 말과 다를 바 없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며, 그렇게 살 수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도덕이 실재한다면 하나님의 성품이 그 근거로 가장 자연스럽다고 봅니다. 신을 믿지 않으면서도 도덕이 실재한다고 보는 철학자도 많으므로, 이것은 증명이 아니라 어느 설명이 더 나은가의 문제입니다.

"문화마다 도덕이 다르지 않은가?" 실제로 다릅니다. 어떤 사회에서 당연했던 일이 다른 사회에서는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차이만 보면 공통점을 놓칩니다. 이웃을 해치는 것, 거짓 증언, 은혜를 저버리는 것을 완전히 칭찬한 문화는 찾기 어렵다고 말하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도덕적 개혁가의 존재입니다. 자기 사회의 관습이 틀렸다고 말한 사람들이 옳았다고 우리가 생각한다면, 우리는 문화보다 높은 기준이 있다고 이미 믿고 있는 셈입니다. 성경은 그 차이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양심은 있지만 죄로 흐려졌고, 그래서 우리에게는 밝히 보여 주는 계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성경 자신도 이 어려움을 모른 체하지 않아서, 사사 시대를 이렇게 요약합니다. "그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눈에 옳은 것을 행하였더라." (삿 21:25).

"종교인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악을 저질렀다. 하나님 없이도 선할 수 있지 않은가?" 두 가지 모두 사실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이웃을 돌보고 정직하게 사는 일은 흔하며, 바로 로마서 2장이 말하는 바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이 사람에게 남아 있는 증거로 봅니다 (창 1:27). 또 교회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잘못을 저지른 역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준이 틀렸다는 증거가 아니라, 그 기준을 따르는 사람이 기준에 못 미친다는 증거입니다. 성경이 먼저 그렇게 말합니다 (롬 3:23).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라는 경고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진 것이었습니다 (사 5:20).

더 생각해 보기

선악을 누가 정하는가라는 물음은 결국 선이 어떤 분의 얼굴을 하고 있는가라는 물음입니다. 성경의 대답은 선이 하나의 이론이 아니라 한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윤리는 규칙을 외우는 일이기 전에 그분을 알아 가는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모두 그 기준에 못 미친다는 사실은 이 이야기를 정죄로 끝내지 않고 은혜로 이어지게 합니다 (죄란 무엇인가?).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나는 어떤 일이 "정말 옳지 않다"고 느낀 적이 있고, 그 확신은 어디에서 왔다고 생각합니까? 내가 선악의 기준을 '내가 편한 것'으로 바꾸고 있는 부분은 없습니까? 만일 선이 하나님의 성품이라면, 내 삶에서 달라져야 할 한 가지는 무엇일까요?

더 읽으려면 사랑이란 무엇인가?와 구약의 율법은 지금도 지켜야 하는가?, 진리란 무엇인가?를 보십시오. 마태복음 22장 34-40절과 로마서 2장을 천천히 읽는 것도 좋은 출발입니다.

출처

  1. 플라톤, 에우티프론 10a — 선은 신이 명해서 선한가, 선해서 신이 명하는가?

성경과 고전 주석을 바탕으로, 역사적 기독교 신앙(사도신경, 니케아 신경)의 관점에서 쓴 글입니다. 그리스도인 사이에 견해가 갈리는 문제는 여러 견해를 함께 소개합니다. 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