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의심해도 괜찮은가?

짧은 답

성경은 의심하는 사람을 내치지 않습니다. 도마와 세례 요한과 시편 기자들은 정직하게 물었고, 하나님은 그들을 받아 주셨습니다. 다만 믿음을 포기하려는 마음으로 굳어진 불신앙과, 이해를 구하며 하나님께 묻는 의심은 다릅니다. 의심은 공동체와 말씀과 기도 안에서 인내하며 풀어 갈 수 있는 길입니다.

성경의 답

의심은 믿음 없는 사람만의 일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의심한 사람들이 가득합니다. 가장 잘 알려진 이는 도마입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처음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그는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다른 제자들의 말을 그는 이렇게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였으나 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그분의 두 손의 못 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분 옆구리에 넣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요 20:25

예수께서는 여드레 뒤에 다시 오셔서 그가 말한 그대로 보고 만져 보라고 하십니다. 도마의 입에서 나온 것은 복음서에서 가장 큰 고백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도마가 그분께 응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하매

요 20:28

또 한 사람은 세례 요한입니다. 요한은 예수를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라 증거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헤롯의 감옥에 갇히자 제자들을 보내어 이렇게 묻습니다.

그분께 이르되, 선생님이 오실 그분이오니이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리오리이까? 하니

마 11:3

예수께서는 꾸짖지 않으십니다.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는 일을 가서 요한에게 알리라고 하시고 (마 11:4-5), 뒤이어 요한을 높이 칭찬하십니다 (마 11:11).

시편에도 의심과 항변이 가득합니다. "오 주여, 어느 때까지 나를 잊으려 하시나이까? 영원히 잊으려 하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어느 때까지 내게 숨기려 하시나이까?" (시 13:1). 시편 73편의 기자는 악인이 형통하는 것을 보며 "그러나 나로 말하건대 내 발은 거의 지나갈 뻔하였고 내 걸음은 미끄러질 뻔하였으니"라고 고백합니다 (시 73:2). 시편 88편은 끝까지 어둠 속에서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이런 노래가 성경에 실려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직한 물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믿음과 의심이 한 마음에 함께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귀신 들린 아들을 데려온 아버지는 이렇게 외칩니다.

즉시 그 아이의 아버지가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지 아니함을 도와주소서, 하더라.

막 9:24

예수께서는 이 기도를 물리치지 않고 아이를 고쳐 주십니다. 부활 후 갈릴리 산 위에서도, 예수를 뵙고 경배하는 제자들 가운데 "그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였으나 의심하는 자들도 있더라."고 복음서는 숨김없이 기록합니다 (마 28:17). 그런데도 예수께서는 바로 그들에게 온 세상으로 가서 제자를 삼으라고 맡기십니다.

하나님은 이성을 사용하라고도 초대하십니다.

주가 말하노라. 이제 오라. 우리가 함께 변론하자. 너희 죄들이 주홍 같을지라도 눈같이 희게 될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사 1:18

그리고 유다서는 교회에게 이렇게 명합니다.

차이를 두어 어떤 사람들은 불쌍히 여기고

유 1:22

교회의 증언

교회는 의심하는 사람을 오래도록 인내로 대하려 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 첫머리에서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 안에서 쉬기까지 쉼이 없다고 말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1.1. 그 자신이 오랜 방황과 물음 끝에 믿음에 이른 사람입니다.

세례 요한의 물음에 대해서는 교부들의 해석이 갈립니다. 암브로시우스는 어떤 이들의 해석을 소개하며, 요한이 "믿음에서가 아니라 사랑에서 의심하였다"고 말합니다. 오실 그분이 죽음을 겪으시리라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는 것입니다 암브로시우스. 반대로 힐라리우스는 요한이 "자기의 무지가 아니라 제자들의 무지를 위하여 준비하는 것"이라고 보고, 의심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힐라리우스. 매튜 헨리는 두 해석을 모두 소개한 뒤 이렇게 씁니다.

참된 믿음이 있는 곳에도 불신앙이 섞여 있을 수 있습니다

매튜 헨리

도마에 대해 크리소스토무스는 예수께서 곧바로 나타나지 않고 여드레를 기다리신 이유를 이렇게 풀이합니다.

제자들 앞에서 주어진 권고가 그에게 더 큰 열망을 일으키고 장래를 위한 그의 믿음을 굳게 하려 하심입니다

크리소스토무스

도마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모인 자리에서 만났습니다. 의심하는 사람이 공동체 안에 머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여기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레고리우스는 도마의 고백에 이르러 이렇게 풀이합니다. 도마는 "하나를 보고 다른 하나를 믿었기 때문이니, 사람을 보고 하나님을 고백하였습니다" 그레고리우스.

마가복음 9장의 아버지에 대해 매튜 헨리는 말합니다. "불신앙을 호소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우러러보며 그것을 이기도록 도와줄 은혜를 구해야 하며, 그분의 은혜가 그들에게 족할 것입니다" 매튜 헨리.

원어로 보기

신약에는 '의심'으로 옮겨지는 말이 여럿입니다. 베드로가 물 위에서 가라앉을 때 예수께서 "왜 의심하였느냐"고 하신 말씀과 부활 후 산 위에서의 "의심하는 자도 있더라"에 쓰인 동사가 디스타조(διστάζω)입니다. 이 말은 두 길 사이에서 머뭇거린다는 뜻으로, 믿음과 불신 사이에서 망설이는 모습을 그립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 붙잡아 주십니다 (마 14:31).

야고보서 1:6과 유다서 1:22의 디아크리노(διακρίνω)는 본래 "나누다, 구별하다"는 뜻이며, 마음이 갈라져 흔들리는 상태를 말합니다. 유다서 22-23절은 사본에 따라 문장 구성이 달라서, 어떤 번역은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로, 어떤 번역(영어 흠정역 등)은 "구별하여"로 옮깁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번역과 교회는 이 구절을 의심하는 이들에 대한 긍휼의 명령으로 읽습니다.

아피스티아(ἀπιστία)는 "믿지 않음"입니다. 마가복음 9:24의 "믿음 없는 것"이 이 말입니다. 아버지는 믿음과 불신앙을 한꺼번에 입에 올리며, 불신앙의 도움을 하나님께 구합니다. 도마에게 하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의 "믿음 없는 자"는 같은 계열의 말인 아피스토스입니다 (요 20:27). 의심하는 사람을 믿음으로 부르시는 초대입니다.

흔한 반론과 답

"야고보서는 의심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아무것도 받지 못한다고 하지 않는가?" 이것은 의심으로 괴로운 사람들이 자주 걸려 넘어지는 구절입니다. 야고보는 지혜를 구하는 기도에 대해 "그러나 그는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흔들리지 말지니라. 흔들리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나니" (약 1:6)라고 합니다. 앞뒤를 읽으면 야고보가 겨냥하는 것은 정직한 질문이 아니라, 하나님께 구하면서 마음 한쪽으로는 하나님을 믿지 않고 두 마음을 품은 상태입니다 (약 1:8). 같은 구절 바로 앞에서 야고보는 하나님이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너그러이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그것을 그에게 주시리라." 분이라고 합니다 (약 1:5). 도마와 아버지는 하나님 앞에 나아와 구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묻는 의심과, 하나님을 떠나려는 불신은 다릅니다.

"예수께서는 도마를 책망하셨고,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 말씀을 읽고 증거를 구하는 것 자체가 믿음이 부족한 일이라고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도마가 구한 것을 그대로 주셨습니다 (요 20:27).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도마야, 너는 나를 보았으므로 믿었으나 보지 않고도 믿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요 20:29)는 보지 못한 채 믿게 될 후대의 신자들을 위한 격려이지, 증거를 찾는 사람에 대한 정죄가 아닙니다. 요한은 이어서 이 복음서를 기록한 이유가 읽는 이로 "이것들을 기록함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믿고 그분의 이름을 통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이라고 합니다 (요 20:31). 믿음은 증거 없이 믿는 것이 아니라 증거를 가지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의심이 풀리지 않는다면, 정직하게 믿음을 버리는 것이 옳지 않은가?" 이 물음은 진지하게 받아야 합니다. 정직은 중요합니다. 성경도 "모든 것을 시험해 보고 선한 것을 굳게 붙들라."라고 합니다 (살전 5:21). 의심을 억누르고 모르는 척하는 것이 믿음은 아닙니다. 그리고 실제로 의심 끝에 신앙을 떠나는 사람이 있으며, 교회는 그들을 멸시하지 말고 기도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다만 해결되지 않은 물음이 곧 신앙이 거짓이라는 판결은 아닙니다. 우리는 많은 것을 완전히 알지 못한 채 신뢰하며 삽니다. 또한 예수께서는 "어떤 사람이 그분의 뜻을 행하려 하면 그 교리가 하나님에게서 왔는지 혹은 내가 스스로 말하는지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요 7:17). 머리의 물음 가운데 어떤 것은 순종의 걸음을 한 발 내디딜 때에야 풀립니다. 그래서 의심을 감추지 말고, 그 물음을 가지고 하나님과 교회 곁에 머물며 계속 찾아보기를 권합니다. 결론은 읽는 이의 몫입니다.

더 생각해 보기

의심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당신을 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의심을 어떻게 다루느냐가 중요합니다. 성경과 교회가 보여 주는 길은 네 가지입니다. 첫째, 공동체입니다. 도마는 제자들 곁에 머물렀기에 다시 주님을 만났습니다 (히 10:25). 둘째, 말씀입니다. 시편 73편의 기자는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갔을 때에야 비로소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라고 합니다 (시 73:17). 셋째, 기도입니다. 의심 그대로를 아뢰십시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는 가장 짧고 정직한 기도입니다. 넷째, 인내입니다. 어떤 물음은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풀립니다. 그리고 의심이 깊은 슬픔이나 우울과 함께 올 때는 믿음의 문제로만 보지 마십시오. 도움이 필요한 때일 수 있습니다 (우울증은 믿음이 부족해서인가?).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내 의심은 무엇을 향한 물음입니까? 나는 그 물음을 하나님께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까? 혹시 어떤 의심은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순종하기 싫은 마음에서 오는 것은 아닙니까?

더 읽으려면 믿음이란 무엇인가?와 하나님은 존재하는가?를 보십시오.

출처

  1.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읽기

성경과 고전 주석을 바탕으로, 역사적 기독교 신앙(사도신경, 니케아 신경)의 관점에서 쓴 글입니다. 그리스도인 사이에 견해가 갈리는 문제는 여러 견해를 함께 소개합니다. 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