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3과

한국의 장로교회

한국 장로교회는 한국어 성경과 선교사들의 수고, 그리고 스스로 말씀을 읽고 전한 한국인 신자들에게서 자랐습니다. 부흥과 독노회의 기쁨도, 신사참배 결의와 분열의 아픔도 있는 이 역사는 오늘의 교회를 감사와 회개와 하나 됨으로 부릅니다.

말씀이 먼저 왔습니다

한국 개신교의 이야기는 선교사보다 성경이 먼저 들어온 데서 시작됩니다. 1880년대 초 만주에서 일하던 스코틀랜드 장로교 선교사 존 로스는 한국인 조력자들과 함께 복음서를 한국어로 옮겼고, 몇 해 뒤에는 신약 전체를 펴냈습니다. 이 성경을 품고 국경을 넘은 이들이 있었고, 선교사가 오기 전에 이미 복음서를 읽고 믿은 한국인들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1884년 미국 북장로교의 의료 선교사 호러스 알렌이 먼저 들어왔고, 1885년 부활절 무렵에는 장로교의 호러스 언더우드와 감리교의 헨리 아펜젤러가 제물포에 닿았습니다. 뒤이어 미국 남장로교와 호주와 캐나다의 장로교 선교사들도 와서 함께 일했습니다. 선교사들은 학교와 병원을 세우고 성경 번역에 힘을 모았습니다.

1890년에는 중국에서 일하던 선교사 존 네비우스가 서울을 찾아 자기의 선교 원칙을 소개했습니다. 교회가 스스로 살림을 꾸리고(자립), 스스로 다스리며(자치), 스스로 복음을 전한다(자전)는 원칙입니다. 장로교 선교사들은 이를 받아들였고, 신자들이 모여 며칠씩 성경을 배우는 사경회가 교회 생활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한국 교회는 평신도들이 말씀을 사모하는 교회로 자랐습니다.

부흥과 독노회

1907년 1월 평양 장대현교회의 사경회에서 큰 회개의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은 공개적으로 죄를 고백하며 울었고, 서로 용서를 구하고 잘못을 갚았습니다. 이 부흥은 여러 지역으로 번졌고, 새벽 기도와 통성 기도처럼 지금도 한국 교회에 이어지는 기도의 모습이 이 무렵 뿌리내렸다고 많은 이들이 말합니다. 그 중심에 섰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 길선주였습니다.

같은 해 9월 평양에서 한국 장로교회의 첫 노회인 독노회가 조직되었습니다. 여러 장로교 선교부가 나라마다 따로 교회를 세우지 않고 하나의 한국 교회를 세우기로 한 결과였습니다. 독노회는 평양의 신학교를 마친 일곱 사람을 첫 한국인 목사로 세웠고, 그 가운데 이기풍을 제주에 보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신앙의 기준으로 12신조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받아들였습니다 12신조. 12신조는 인도 장로교회의 신조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하는 데서 시작해 공교회의 믿음과 개혁교회의 가르침을 짧은 조항에 담았습니다. 1912년에는 첫 총회가 조직되었습니다. 당회와 노회와 총회로 이어지는 교회의 질서는 장로 정치 과에서 다룹니다.

신사참배와 순교

1930년대에 조선총독부는 학교와 교회에 신사참배를 강요했습니다. 신사참배는 국가 의식일 뿐 종교가 아니라는 것이 당국의 주장이었습니다. 일부 선교부는 이를 따르느니 학교 문을 닫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1938년 장로교 총회는 경찰의 감시와 압력 아래 신사참배를 받아들이는 결의를 했습니다.

이 결의를 따르지 않은 이들은 큰 값을 치렀습니다. 평양 산정현교회의 주기철 목사는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여러 차례 갇혔고, 1944년 옥중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와 함께 많은 목사와 신자가 갇히고 고난을 받았으며, 감옥에서 목숨을 잃은 이들도 있었습니다. 주님은 고난 앞에 선 서머나 교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장차 당할 그것들 중의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마귀가 너희 중에서 몇 사람을 감옥에 던져 넣어 너희를 시험하리니 너희가 열흘 동안 환난을 당하리라. 너는 죽기까지 신실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계 2:10

매튜 헨리는 이 약속을 풀며 "그분을 섬기다 닳아 없어지거나 그분의 일을 위하여 버린 생명은 영원한 훨씬 더 좋은 생명으로 상을 받을 것입니다"라고 씁니다 매튜 헨리.

이 역사는 누구를 탓하려고 기억하는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 속에서 굴복한 이들도 우리와 같이 연약한 사람이었고, 같은 자리에 섰다면 우리가 어떠했을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해방 뒤 총회는 이 결의를 취소했고(1954년으로 전해집니다), 그 뒤 여러 교단이 이를 죄로 고백하며 공적으로 회개해 왔습니다. 교회는 순교자들의 신실함에 감사하면서, 자기의 연약함을 숨기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내려놓습니다.

나뉜 교회와 하나 됨의 부름

해방 뒤 한국 장로교회는 여러 차례 나뉘었습니다. 1952년에는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와 교회 쇄신의 문제를 두고 고려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이들이 고신 교단을 이루었습니다. 1953년에는 성경관과 신학 교육을 둘러싼 논쟁 끝에 기장(한국기독교장로회)이 따로 섰고, 1959년에는 세계교회협의회(WCC) 가입 문제 등을 둘러싸고 합동과 통합이 갈라졌습니다. 그 뒤로도 나뉨이 이어져 오늘 한국에는 많은 장로교 교단이 있습니다. 각 교단에는 저마다 지키려 한 확신이 있었고, 그 과정에는 모두의 죄와 연약함도 섞여 있었습니다. 오늘 장로교회는 한국 개신교회 가운데 가장 큰 가족이고, 그만큼 하나 됨을 위한 책임도 무겁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분파를 이렇게 꾸짖었습니다.

이제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곧 너희가 각각 이르기를,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께 속하였다, 하는도다. 그리스도께서 나뉘셨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혔느냐? 혹은 너희가 바울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았느냐?

고전 1:12-13

예수께서는 제자들이 "다 하나가 되어" 세상이 믿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요 17:21). 크리소스토무스는 이 기도를 풀며 "분열처럼 큰 거리낌은 없고, 믿는 이들 사이의 일치는 믿는 데 큰 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합니다 크리소스토무스. 하나 됨은 사람이 만들어 내기 전에 이미 주어진 선물입니다. 바울은 성령께서 이루신 하나 됨을 "화평의 매는 띠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하며 (엡 4:3), 그 까닭을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를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것 같이 한 몸과 한 성령이 있고 한 주와 한 믿음과 한 침례가 있으며 한 하나님이 계시니 곧 모든 것의 아버지시라. 그분께서는 모든 것 위에 계시고 모든 것에 두루 계시며 너희 모두 안에 계시느니라.

엡 4:4-6

한국 장로교회의 역사는 은혜와 부끄러움을 함께 보여 줍니다. 말씀을 사모해 사경회에 모이던 신자들, 죽기까지 충성한 순교자들, 그리고 무너지고 나뉜 교회가 모두 그 안에 있습니다. 오늘의 장로교인은 이 역사를 자랑이 아니라 감사와 회개로 이어받고, 다른 교단과 다른 전통의 형제자매를 그리스도 안의 한 가족으로 대합니다. 교회가 왜 이렇게 나뉘었는지는 교회는 왜 이렇게 많이 나뉘었는가?에서 더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연습

  1. 연습 1 / 8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오기 전, 만주에서 한국인 조력자들과 함께 복음서를 한국어로 옮긴 스코틀랜드 선교사는 누구입니까?

  2. 연습 2 / 8

    1885년 제물포에 함께 닿은 두 선교사에 대한 설명으로 바른 것은 무엇입니까?

  3. 연습 3 / 8

    네비우스 방법이 강조한 세 가지 원칙은 무엇입니까?

  4. 연습 4 / 8

    1907년 조직된 독노회가 신앙의 기준으로 받아들인 것은 무엇입니까?

  5. 연습 5 / 8

    주기철 목사에 대한 설명으로 바른 것은 무엇입니까?

  6. 연습 6 / 8

    요한계시록 2:10에서 주님은 고난 앞에 선 서머나 교회에 무엇을 약속하셨습니까?

  7. 연습 7 / 8

    해방 뒤 한국 장로교회의 분열에 대한 설명으로 바른 것은 무엇입니까?

  8. 연습 8 / 8

    에베소서 4:3-6은 교회의 하나 됨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출처

  1.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 12신조 1907 — 첫 독노회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과 함께 받아들인 신조. 인도 장로교회의 신조를 바탕으로 했다.

성경과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벨직 신앙고백, 도르트 신경)을 바탕으로 한 강의입니다. 개혁주의 신앙을 가르치되, 다른 전통의 견해도 공정하게 소개합니다. 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