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15과

중세 말의 위기와 개혁의 선구자들

14–15세기 서방 교회는 아비뇽 교황청과 교황청의 대분열, 흑사병으로 깊이 흔들렸습니다. 그 속에서 오컴의 새 신학과 근대적 경건이 자랐고, 위클리프와 후스는 성경을 교황 위에 두었으며, 인문주의자들은 ‘원천으로’ 돌아가 에라스무스의 헬라어 신약성경을 내놓아, 16세기 종교개혁의 문을 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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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교회

13세기의 교황들은 유럽의 왕들 위에 설 만큼 큰 권위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14세기에 들어 사정이 달라졌습니다. 1309년 교황청이 남프랑스의 아비뇽으로 옮겨 가 1377년까지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그동안 교황들은 모두 프랑스 사람이었고 교황청의 재정 제도는 커졌으며, 이탈리아의 시인 페트라르카 같은 이들은 아비뇽을 바빌론에 빗대었습니다. 시에나의 카타리나 같은 이들의 간청 속에 교황은 1377년 로마로 돌아갔습니다.

이듬해 더 큰 상처가 났습니다. 1378년 로마에서 교황이 선출된 지 몇 달 만에 그를 뽑은 추기경들이 그 선거가 무효라며 다른 교황을 세웠고, 그는 아비뇽으로 돌아갔습니다. 유럽의 나라들은 저마다 한쪽 교황을 따랐고, 1409년 피사 공의회가 두 교황을 모두 폐위하고 새 교황을 뽑자 교황은 셋이 되었습니다. 이 대분열은 콘스탄츠 공의회(1414–1418)가 세 교황의 자리를 정리하고 1417년 마르티노 5세를 세우면서 끝났습니다. 이 공의회는 공의회가 그 권위를 그리스도께 직접 받는다고 선언했고, 교회의 개혁을 교황보다 공의회에 맡기려는 흐름이 한동안 힘을 얻었습니다. 훗날 교황들은 공의회가 교황 위에 있다는 생각을 거부했습니다.

그 사이 1347년부터 1351년까지 흑사병이 유럽을 휩쓸었습니다. 많은 학자는 유럽 인구의 3분의 1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고 봅니다. 많은 사제가 병자를 돌보다 함께 죽었고, 죽음과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사람들의 경건을 깊이 물들였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유대인들에게 죄를 씌워 학살하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교황 클레멘스 6세가 이를 막으려 했지만 다 막지 못했습니다. 이 시대 교회의 부끄러운 한 장입니다.

새 길과 새 경건

신학도 변했습니다. 잉글랜드의 프란치스코회 수사 오컴의 윌리엄(약 1287–1347)은 ‘사람됨’ 같은 보편 개념은 생각 속의 이름일 뿐이고 실제로 있는 것은 낱낱의 사물뿐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를 유명론이라 합니다. 그는 하나님이 어떤 필연에도 매이지 않으시고 오직 자유로운 뜻으로 지금의 질서를 정하셨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를 따른 학자들의 신학은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옛 길’과 구별되어 ‘새 길’이라 불렸습니다.

‘새 길’의 신학자들은, 특히 15세기의 가브리엘 비엘은, 하나님이 자기 안에 있는 것을 다하는 사람에게 은혜를 거절하지 않으시기로 스스로 약속하셨다고 가르쳤다고 흔히 요약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유와 너그러우심을 높이려 했지만, 이 가르침은 구원의 첫걸음을 사람의 손에 두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이런 흐름에 맞선 목소리도 중세 안에 있었습니다. 1349년 캔터베리 대주교가 되었다가 그해 흑사병으로 세상을 떠난 토머스 브래드워딘은 당시의 이런 경향을 ‘새 펠라기우스주의’라 부르며 아우구스티누스의 은혜 교리를 변호했습니다. 에르푸르트에서 ‘새 길’의 신학을 배운 젊은 루터도 훗날 바울을 따라 이를 거절합니다. 바울은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으며"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롬 3:11).

같은 시대 네덜란드에서는 ‘근대적 경건’이라 불리는 운동이 자랐습니다. 데벤터의 설교자 헤르트 흐로터(1340–1384)를 따르는 평신도들은 ‘공동생활 형제단’을 이루어 함께 기도하고 일하며 책을 베끼고 아이들을 가르쳤습니다. 이 흐름에서 나온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흔히 토마스 아 켐피스(약 1380–1471)의 글로 여겨지지만, 지은이를 두고는 오래 논의가 있었습니다. 이 책은 통회를 정의할 줄 아는 것보다 통회를 느끼는 것이 낫다며, 겸손과 마음의 회개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으로 독자를 부릅니다. 개신교인들도 이 책을 아꼈고, 존 웨슬리는 그 번역본을 펴내기도 했습니다.

말씀으로 돌아가라

옥스퍼드의 학자 존 위클리프(약 1330–1384)는 성경을 교회의 모든 가르침과 교황의 권위 위에 두었습니다. 그는 교회가 택함받은 이들의 모임이며,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교황에게는 순종할 까닭이 없다고 가르쳤고, 화체설도 비판했습니다. 1382년 그의 가르침은 정죄되었지만, 그는 시골 교구에서 지내다 1384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무렵 그의 제자들은 라틴어 성경을 영어로 옮긴 첫 영어 성경 전체를 내놓았습니다. 위클리프 자신이 얼마나 손을 댔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롤라드’라 불린 그의 추종자들은 이 성경을 들고 다니며 설교하다가 박해를 받았고, 1409년 잉글랜드 교회는 주교의 허가 없이 성경을 영어로 옮기거나 그런 번역을 읽는 것을 금했습니다.

시편 기자의 고백이 이들의 마음이었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 119:105

매튜 헨리는 이 구절을 두고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일과 길을 지도해 주며, 그것이 없다면 세상은 참으로 어두운 곳이 될 것입니다"라고 씁니다 매튜 헨리. 아모스는 하나님이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라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기갈을 보내실 날을 경고했습니다 (암 8:11).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만 듣던 많은 이에게 중세 말은 그런 목마름의 시대였습니다. 헨리도 아모스서에서 어떤 이들은 이 기근을 깊이 느껴 "좋은 설교를 들으려고 먼 길을 갈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매튜 헨리.

위클리프의 글은 보헤미아로 건너가 프라하의 설교자 얀 후스(약 1372–1415)에게 닿았습니다. 후스는 베들레헴 예배당에서 체코어로 설교하며 성직자의 부패를 꾸짖었습니다. 1413년의 『교회에 관하여』에서 그는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머리이시며, 교회는 택함받은 이들의 모임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얀 후스, 교회에 관하여. 바울도 그리스도를 몸인 교회의 머리라고 부릅니다 (골 1:18).

후스는 지기스문트 왕(훗날 황제)이 내준 안전 통행증을 받고 콘스탄츠 공의회에 갔지만 곧 갇혔습니다. 그는 성경으로 설득되지 않는 한 자기 가르침을 취소할 수 없다고 했고, 1415년 7월 6일 화형을 당했습니다. 같은 공의회는 위클리프도 정죄했고, 1428년 그의 유해는 무덤에서 파내어져 불태워졌습니다. 후스가 죽으며 거위(체코어로 ‘후스’)는 구워져도 백 년 뒤에 백조가 오리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는 후대의 전설입니다. 그러나 보헤미아에서 그의 운동은 꺼지지 않았습니다.

원천으로, 그리고 개혁의 문턱

14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15세기에 꽃핀 인문주의는 ‘원천으로’ 돌아가자고 외쳤습니다. 오래된 해설을 거쳐서가 아니라 고전과 성경과 교부들을 원래 언어로 읽자는 것입니다. 데벤터의 학교에서 배운 네덜란드의 에라스무스(약 1466–1536)는 1516년 바젤에서 헬라어 신약성경을 처음으로 출판했고, 거기에 새 라틴어 번역과 주석을 붙였습니다 에라스무스, 헬라어 신약성경. 그는 서문에서 농부가 쟁기를 끌며, 베 짜는 이가 베틀 앞에서 성경을 흥얼거리기를 바란다고 썼습니다.

헬라어 본문은 익숙한 구절도 새로 읽게 했습니다. 예수께서 "회개하라"고 하신 말씀을 (마 4:17) 라틴어 성경은 ‘paenitentiam agite’로 옮겨 ‘고해를 행하라’로도 읽힐 수 있었는데, 에라스무스는 헬라어가 마음을 돌이킨다는 뜻에 가깝다고 풀었습니다. 그 라틴어가 실제로 얼마나 고해 성사로 읽혔는지는 학자마다 평가가 다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엮은 카테나에서도, 크리소스토무스의 이름으로 전해 온 주석의 저자인 위(僞)크리소스토무스는 이 말씀을 두고 "회개는 의지를 바로잡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위(僞)크리소스토무스. 에라스무스는 끝까지 가톨릭 교회에 남아 안에서부터의 개혁을 바랐지만, 그의 헬라어 신약성경은 루터와 개혁자들이 원문으로 돌아가는 길을 열었습니다.

중세 말의 교회를 어둠으로만 그리는 것은 공정하지 않습니다. 이 시대에도 병자를 돌보다 쓰러진 사제들이 있었고, 그리스도를 본받으려 한 평신도들이 있었으며, 교회를 바로 세우려던 공의회와 학자들이 있었습니다. 같은 카테나에서 위(僞)크리소스토무스는 "그리스도의 복음은 자기의 욕망을 다스릴 수 있고, 이생의 재물을 경멸하며, 헛된 영예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전파해야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위(僞)크리소스토무스. 중세 교회는 이 기준을 스스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개혁은 점점 미룰 수 없는 일이 되었습니다. 교황이 둘, 셋으로 갈린 일은 교회의 권위를 깊이 흔들었고, 많은 신자는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 말씀을 들었으며, 자기 안에 있는 것을 다하라는 가르침은 많은 양심에 ‘나는 충분히 했는가’ 하는 불안을 남겼습니다. 후스와 많은 롤라드는 그 대가를 목숨으로 치렀습니다. 그들이 붙든 물음, 곧 무엇이 교회의 마지막 권위이며 죄인은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서는가는 16세기에 종교개혁으로 터져 나옵니다 (개혁주의 신앙 과정의 종교개혁 이야기 과, 이 과정의 루터 과).

연습

  1. 연습 1 / 7

    1378년부터 1417년까지 이어진 교황청의 대분열을 끝낸 공의회는 무엇입니까?

  2. 연습 2 / 7

    오컴의 윌리엄과 관련된 ‘유명론’의 생각으로 바른 것은 무엇입니까?

  3. 연습 3 / 7

    흔히 토마스 아 켐피스의 글로 여겨지며, 근대적 경건 운동에서 나온 책은 무엇입니까?

  4. 연습 4 / 7

    존 위클리프에 대한 설명으로 바른 것은 무엇입니까?

  5. 연습 5 / 7

    얀 후스가 『교회에 관하여』에서 가르친 것은 무엇입니까?

  6. 연습 6 / 7

    에라스무스의 1516년 헬라어 신약성경과 관련된 설명으로 바른 것은 무엇입니까?

  7. 연습 7 / 7

    아모스 8:11이 말하는 기근은 무엇입니까?

출처

  1. 얀 후스, 교회에 관하여 1413 —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머리이며, 교회는 택함받은 이들의 모임이라고 가르친다.
  2. 에라스무스, 헬라어 신약성경 1516 — 처음으로 출판된 헬라어 신약성경. 새 라틴어 번역과 함께 실렸고, 루터와 개혁자들이 원문으로 돌아가는 길을 열었다.

성경과 교회의 신경, 교부와 신학자들의 글을 바탕으로 한 강의입니다. 복음주의 신앙에 서서, 각 전통과 신학자를 먼저 그들 자신의 말로 공정하게 소개한 뒤 성경에 비추어 살핍니다. 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