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예수는 왜 비유로 말씀하셨는가?

짧은 답

비유는 일상의 이야기를 빌려 하나님 나라를 보여 주는 말하기입니다. 이야기는 듣는 사람을 안으로 끌어들여 스스로 판단하게 하고, 그래서 마음을 여는 사람에게는 진리를 환히 비추고 마음을 닫은 사람에게는 오히려 가려 줍니다. 복음서는 이 두 면을 모두 말하며, 예수께서도 그렇게 의도하셨다고 교회는 이해해 왔습니다.

성경의 답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의 가르침에서 비유는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 씨 뿌리는 사람, 잃은 양, 돌아온 아들 같은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드뭅니다. 그런데 정작 제자들이 이 방식을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마태복음은 제자들이 나아와 "제자들이 나아와 그분께 이르되,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하매" 하고 물었다고 전합니다 (마 13:10). 예수의 대답은 쉽지 않은 말씀입니다. 마가복음에서는 이렇게 기록됩니다.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의 왕국의 신비를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밖에 있는 자들에게는 이 모든 것이 비유로 행하여졌나니 이것은 그들이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사 언제라도 그들이 회심하여 자기 죄들을 용서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시고

막 4:11-12

이 말씀만 떼어 읽으면 비유가 진리를 숨기려는 장치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같은 장의 뒤쪽에서 마가는 정반대의 뜻을 말합니다.

그분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그들이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대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막 4:33

비유는 사람들이 "알아 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하시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풀어 주셨습니다 (막 4:34). 두 구절을 함께 읽으면 비유의 성격이 드러납니다. 비유는 열린 마음에는 문이고, 닫힌 마음에는 벽입니다.

그 작동 방식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잘 나타납니다. 씨는 같은 씨인데 길가와 돌밭과 가시떨기와 좋은 땅에서 다르게 자랍니다 (막 4:3-9).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풀어 주시며 말씀을 듣는 마음의 상태가 네 가지라고 하십니다 (막 4:14-20). 비유는 말씀을 전하면서 동시에 "너는 어떤 땅인가"를 듣는 사람에게 묻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야기 끝에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하시니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막 4:9).

이야기는 듣는 사람을 자기 안으로 끌어들입니다. 구약에도 같은 방식이 있었습니다. 선지자 나단은 다윗의 죄를 직접 지적하지 않고 부자와 양 한 마리뿐인 가난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다윗이 분노하여 그런 사람은 죽어 마땅하다고 선언했을 때, 나단은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왕이 그 사람이니이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나이다. 내가 네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을 다스릴 왕으로 삼고 너를 사울의 손에서 건져 냈으며" 하고 말했습니다 (삼하 12:7).

예수의 비유도 그렇게 작동합니다. 누가복음 15장은 이야기의 배경을 먼저 알려 줍니다.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모여들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리며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먹는다, 하더라." 하고 원망했습니다 (눅 15:1-2). 이 원망에 대한 대답이 잃은 양, 잃은 은전, 그리고 돌아온 탕자의 이야기입니다. 집을 나갔던 아들이 돌아올 때 아버지는 이렇게 맞이합니다.

일어나서 자기 아버지께로 가니라. 그러나 그가 아직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 그의 아버지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달려가 그의 목을 껴안고 그에게 입을 맞추매

눅 15:20

그런데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잔치 소리를 듣고 밖에서 화가 난 맏아들에게 아버지가 나와 권하는 장면에서 비유가 끝납니다 (눅 15:28). 맏아들이 들어갔는지는 말해 주지 않습니다. 이 결말은 비유를 듣고 있던 바리새인들에게 묻는 질문입니다. 당신은 들어가겠습니까?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도 비슷합니다. 한 율법사가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그러나 그가 자기를 의롭게 만들려고 예수님께 이르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하니" 하고 묻자 (눅 10:29), 예수께서는 이웃의 정의를 내리지 않고 이야기를 들려주신 뒤 질문을 뒤집으십니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었느냐고 하셨고, 율법사는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가 이르되, 그에게 긍휼을 베푼 자니이다, 하매 이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가서 너도 그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하셨습니다 (눅 10:36-37).

비유가 판단하는 힘도 가졌다는 것은 누가복음 20장에서 드러납니다. 악한 농부들의 비유를 들은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은 "수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그분께서 자기들을 치려고 이 비유를 말씀하신 줄 깨닫고 바로 그 시각에 그분께 손을 대려 하였으나 백성을 두려워하더라." 그분을 잡으려 했습니다 (눅 20:19). 이야기를 알아들은 사람은 자신이 이야기 속에 서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은 분노했습니다.

교회의 증언

교회는 마가복음 4장 11-12절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크리소스토무스는 마태복음 13장 13절을 풀면서, 이 말씀이 운명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합니다. 그는 이렇게 묻습니다. 만일 그들의 눈이 태어날 때부터 멀었다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타고난 눈멂이었다면 그분이 그들의 눈을 열어 주셔야 했을 것입니다.

크리소스토무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눈을 감았다는 것이 크리소스토무스의 설명입니다. 그는 이어서 이렇게 씁니다. "처음에는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지 않고 매우 분명하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이 보고 들은 모든 것을 곡해하였으므로 이제는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크리소스토무스. 곧 비유는 이미 마음을 닫은 사람들에 대한 반응이기도 하다는 풀이입니다.

매튜 헨리는 같은 생각을 간결하게 줄여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 이로써 하나님의 일들은 가르침 받기를 원하는 이들에게는 더 분명하고 쉬워졌으며, 동시에 일부러 무지한 이들에게는 더 어렵고 모호해졌습니다" 매튜 헨리.

비유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교회 안에 서로 다른 전통이 있습니다. 많은 교부는 성경 전체가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보았기에, 비유의 세부 항목마다 영적인 뜻을 찾는 풍유적 해석을 즐겨 썼습니다. 오리게네스와 아우구스티누스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강도 만난 사람을 아담에, 사마리아 사람을 그리스도에, 주막을 교회에 견주었습니다. 칼뱅은 이런 풀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현대 학자 다수는 비유가 놓인 자리에서 이야기가 말하려는 중심 요점을 먼저 찾으려 합니다. 오늘날 많은 해석자는 두 흐름을 함께 씁니다. 예수께서 씨 뿌리는 비유를 직접 풀어 주셨다는 사실은 비유에 풍유적 요소가 있을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한편 이야기의 배경, 곧 누가복음 15장 1-2절이나 10장 29절 같은 대목이 이야기의 핵심 요점을 알려 줍니다.

원어로 보기

신약에서 "비유"로 옮겨진 말은 파라볼레(παραβολή)입니다. 이 말은 "나란히 놓는다"는 뜻에서 왔습니다. 곧 눈에 익은 이야기를 하나님 나라 곁에 나란히 놓아 비교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짧은 비교나 속담, 수수께끼 같은 말까지 두루 가리켰습니다.

이 말의 뿌리는 히브리어 마샬(מָשָׁל)에 있습니다. 마샬은 속담이나 격언, 풍자, 수수께끼를 곁들인 이야기까지 포괄하는 넓은 말입니다. 에스겔 17장 2절에서는 "수수께끼와 비유"가 나란히 나옵니다. 마태복음 13장 35절은 시편 78편 2절의 "내가 입을 열고 비유를 베풀어서 옛 비밀한 말을 발표하리니"를 인용하며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일이 이루어진 예언이라고 설명합니다. 유대인에게 비유는 낯선 방식이 아니라 오래된 지혜 전승의 한 부분이었습니다.

끝으로 "비밀"로 옮겨진 뮈스테리온(μυστήριον)이 있습니다. 신약에서 이 말은 영영 감춰 두는 비법이 아니라, 감춰져 있다가 이제 드러난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은 소수에게만 허락된 암호가 아닙니다. 예수께서 와서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다만 그것을 받으려면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흔한 반론과 답

"마가복음 4장 12절은 예수께서 사람들이 용서받지 못하게 일부러 숨기셨다는 말이 아닌가?" 이것은 가장 무거운 질문입니다. 본문은 분명히 "하려 함이니라"라는 목적의 표현을 씁니다. 해석은 몇 갈래로 나뉩니다. 첫째, 이사야 6장 9-10절의 패턴을 따라 마음을 이미 굳힌 사람들에게 내려지는 하나님의 심판적 반응이라는 풀이입니다. 이사야 때에도 백성은 먼저 듣기를 거부했습니다. 마태복음 13장 13절은 "하려 함이니라" 대신 "~하기 때문이니라"라는 말을 쓰는데, 이것이 이 풀이를 지지한다고 보는 이들이 있습니다. 둘째, 헬라어 접속사가 목적이 아니라 "그 결과 ~하게 된다"는 뜻으로 쓰였다는 풀이입니다. 셋째, 같은 말씀이 한쪽에게는 계시가 되고 다른 쪽에게는 가림이 되는 비유의 이중 작용이라는 풀이입니다. 예정과 자유 의지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다르게 이해하므로, 이 본문에 대한 강조점도 갈립니다. 다만 모두가 동의하는 것이 있습니다. 비유는 사람을 속이려는 것이 아니고, 제자들조차 처음에는 알아듣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막 4:13). 알아들은 사람이 똑똑해서가 아니라 "주었다"는 은혜의 말씀입니다.

"비유는 해석하기 나름이라 아무 뜻이나 갖다 붙일 수 있지 않은가?" 이 비판은 일리가 있습니다. 비유를 지나치게 풍유로 읽어 본문에 없는 교훈을 끌어낸 예가 실제로 많았습니다. 그래서 이야기가 놓인 자리와 중심 요점을 먼저 묻는 것이 좋습니다. 탕자의 비유가 누가복음 15장 1-2절 때문에 죄인을 맞이하시는 하나님을 말한다는 것은 이야기 바깥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해석에 열린 부분은 남지만, 아무 뜻이나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비유는 착하게 살라는 교훈 이야기일 뿐이다." 많은 비유에는 윤리적인 교훈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비유는 먼저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지를 이야기합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기뻐하며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샀습니다 (마 13:44). 이 이야기는 선행을 권하기 전에 하나님 나라가 모든 것을 걸 만큼 값지다고 말합니다. 또 많은 비유 속에서 아버지와 목자와 씨 뿌리는 사람은 예수 자신의 행동을 가리킵니다. 그분이 죄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시는 것이 바로 잃은 것을 찾아 나선 목자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더 생각해 보기

예수의 비유는 우리가 이야기를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가 우리를 판단하게 합니다. 누가복음 15장을 읽을 때 우리는 대개 돌아온 아들 편에 서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아버지의 집 밖에 서 있던 또 한 사람을 남겨 둡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지금 내 마음은 어떤 땅에 가까울까요? 탕자의 비유에서 나는 먼 나라에서 돌아오는 아들일까요, 아니면 집 안에서 들어가기를 망설이는 맏아들일까요? 내가 이해하지 못한 말씀 앞에서 제자들처럼 "홀로 계실 때" 예수께 나아가 물은 적이 있습니까?

더 읽으려면 예수는 무엇을 가르치셨는가?와 성경은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를 보십시오. 누가복음 15장을 한 번에 읽어 보는 것도 좋은 시작입니다.

성경과 고전 주석을 바탕으로, 역사적 기독교 신앙(사도신경, 니케아 신경)의 관점에서 쓴 글입니다. 그리스도인 사이에 견해가 갈리는 문제는 여러 견해를 함께 소개합니다. 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