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일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짧은 답

성경에서 일은 타락 이후에 생긴 형벌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에게 맡기신 처음의 소명입니다. 타락 이후에 달라진 것은 일 자체가 아니라 일에 따라붙는 수고와 헛됨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일을 구원의 수단이나 존재의 증명으로 삼지 않고, 주께 하듯 이웃을 섬기는 길로 받으며, 쉼과 은혜 안에서 일의 한계를 배웁니다.

성경의 답

많은 사람이 일을 하나님의 저주쯤으로 생각합니다. 월요일 아침이 괴롭고 일터가 고단하니 그럴 만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일이 타락 이전에 이미 있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신 뒤 이렇게 하셨습니다.

주 하나님께서 남자를 데려다가 에덴의 동산에 두시고 그것을 가꾸고 지키게 하셨더라.

창 2:15

동산은 놀이터가 아니라 가꿀 곳이었습니다. 하나님 자신도 일하시는 분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시되, 내 아버지께서 지금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고 하셨습니다 (요 5:17).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고 (창 1:27), 땅을 다스리라는 복을 받았습니다 (창 1:28). 일은 하나님의 일에 사람이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일이 왜 이렇게 힘듭니까? 사람이 하나님께 등을 돌린 뒤의 일을 성경은 숨기지 않습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는 그것에서 나는 것은 먹지 말라, 하고 말한 그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았고 너는 평생토록 고통 중에 땅의 소산을 먹으리라.

창 3:17

또한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리라. 네가 들의 채소를 먹으며

창 3:18

눈여겨볼 점이 있습니다. 저주를 받은 것은 땅이고, 달라진 것은 일의 조건입니다.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 가운데서 겪는 수고, 곧 가시와 땀과 실패가 죄의 결과로 따라붙었습니다. 일은 선물로 남았고, 일의 고통은 깨진 세상의 표지가 되었습니다.

신약은 이 일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합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이렇게 씁니다.

또 너희가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해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골 3:23

너희가 상속 유업의 보상을 주에게서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골 3:24

주께 하는 일이라면 어떤 일도 하찮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직접 "목수"로 불리셨고 (막 6:3),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도 천막 만드는 일로 생활했습니다 (행 18:3). 그리고 일은 이웃을 위한 것입니다. 바울은 도적질하던 사람이 "제 손으로 수고하여" 빈궁한 사람에게 줄 것을 얻으라고 말합니다 (엡 4:28).

교회의 증언

성경에 대한 교회의 오랜 읽기는 일을 존귀하게 여겨 왔습니다. 매튜 헨리는 창세기 2장을 풀면서 이렇게 씁니다. "낙원에서도 사람은 일해야 했습니다" 매튜 헨리. 그는 이어서 일의 의미를 이렇게 풀이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 일을 한다면, 무릎을 꿇고 있을 때와 똑같이 참으로 그분을 섬기는 것입니다

매튜 헨리

수도원의 전통은 오랫동안 기도와 노동을 함께 놓았습니다. 그러나 중세에는 '부르심'이라는 말이 주로 사제와 수도자의 삶에 쓰였고, 그들의 일이 농부나 상인의 일보다 거룩하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이 구분에 맞서, 그리스도인은 어떤 일터에서도 부름을 받는다고 가르쳤습니다. 곧 농부, 재판관, 어머니, 하인이 각자 자기 자리에서 이웃을 섬기는 일이 하나님이 맡기신 직분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흔히 소명(직업) 사상이라고 부릅니다. 가톨릭 교회도 일의 존엄을 가르쳐 왔고, 1981년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인간의 노동을 다룬 회칙을 냈습니다. 두 전통은 일이 사람의 존엄에 속하고 이웃 섬김이라는 점에서 만납니다.

타락 이후의 수고에 대해서도 매튜 헨리는 현실을 직시합니다. "노동은 우리가 충실히 행해야 할 본분이며" 매튜 헨리, 그는 이 수고가 타락 뒤 사람이 받은 선고의 일부라고도 말합니다. 그는 같은 대목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가시관을 쓰시고 땀을 흘리셨다고 말합니다. 일의 수고도 그분이 짊어지셨다는 뜻입니다.

원어로 보기

창세기 2:15에서 "다스리며 지키게"로 옮겨진 두 동사는 아바드(עָבַד)와 샤마르(שָׁמַר)입니다. 아바드는 "일하다"이자 "섬기다"이고, 샤마르는 "지키다, 보호하다"입니다. 그러므로 정복하고 마음대로 쓰라는 뜻이 아닙니다. 땅을 섬기고 돌보라는 부르심입니다. 일부 학자들은 이 두 말이 훗날 성막에서 섬기는 레위인의 임무를 가리키는 말로도 함께 쓰이는 점을 들어, 동산을 일종의 성소로 보기도 합니다. 이 해석은 학자들 사이에서 논의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전도서는 일의 수고를 아말(עָמָל)이라 부르고, 그 결과가 헛되다고 헤벨(הֶבֶל)이라 합니다. 헤벨은 본래 "입김, 안개"를 뜻하여, 잡을 수 없이 사라지는 것을 가리킵니다. 전도자가 말하는 헛됨은 일 자체가 쓸모없다는 것이 아니라, 일의 열매를 영원히 붙들 수 없다는 한계입니다. 그래서 그는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가운데서 심령으로 낙을 누리게 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라 하며, 그것을 "사람이 먹고 마시는 것과 스스로 수고하는 가운데 자기 혼으로 하여금 좋은 것을 즐기게 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도다. 내가 이것도 보니 그것이 하나님의 손에서 나왔도다."이라고 말합니다 (전 2:24).

한편 "부르심"으로 옮겨지는 클레시스(κλῆσις)는 고린도전서 7:20에서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지내라고 할 때 쓰입니다. 학자들은 이 말을 그리스도를 믿도록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또는 그 부르심을 받을 때의 처지로 읽습니다. 어느 쪽이든 아직 직업을 가리키는 말은 아닙니다. 루터가 이 말을 일상의 직분으로 넓혀 쓴 것은 모든 자리에서 하나님을 섬긴다는 성경의 더 넓은 가르침에 기댄 것이지만, 이 구절 하나가 직업론을 가르친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흔한 반론과 답

"일은 저주이고, 일하지 않아도 되는 삶이 복이다." 이 생각은 일상의 경험에서 나옵니다. 지루하고 불공정하며 몸을 상하게 하는 일이 실제로 많습니다. 성경도 이를 부인하지 않습니다. 다만 성경은 낙원의 처음부터 일이 있었다고 말하고, 저주의 자리에서 땅과 수고를 구별합니다. 쉼을 명하는 율법도 일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엿새 동안은 네가 수고하고 네 모든 일을 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쉬라고 하십니다 (출 20:9). 또한 바울은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었을 때에도 너희에게 이같이 명령하여 누구든지 일하려 하지 아니하거든 먹지도 말라고 하였노라."고 하는데 (살후 3:10), 문맥을 보면 이것은 일할 수 있는데도 게으른 사람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병들거나 일자리를 잃은 사람을 정죄하는 말이 아닙니다.

"'주께 하듯 하라'는 말은 부당한 노동을 정당화한다." 이것은 진지한 반론입니다. 골로새서 3장의 말씀은 종들에게 주어졌고, 역사에서 이 말씀이 억압을 견디게 하는 데 쓰인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편지는 상전들에게도 "주인들아, 너희 종들에게 정당하고 공정한 것을 베풀며 너희에게도 하늘에 주인이 계심을 알라."라고 말합니다 (골 4:1). 바울은 종에게도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그것을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오히려 그것을 사용하라."고 합니다 (고전 7:21). 주께 하듯 하라는 말은 불의한 제도를 거룩하게 만드는 말이 아니라,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도 하나님이 보신다는 것, 그리고 일하는 사람의 존엄이 고용주의 평가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성경이 노예제를 어떻게 다루는지는 성경은 노예제를 인정하는가?에서 더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일이 이렇게 중요하다면, 일할 수 없는 사람은 무가치한가?" 이것이 가장 아픈 물음일 수 있습니다. 실직한 사람, 병들고 장애가 있는 사람, 나이 들어 은퇴한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이 사람의 가치를 일에 두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사람의 존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데 있고 (창 1:27), 구원은 일이 아니라 은혜로 받습니다. 시편은 "너희가 일찍 일어나고 늦도록 앉아 있으며 고통의 빵을 먹음이 헛되도다. 이처럼 그분께서 자신이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도다."라고 말합니다 (시 127:2). 또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는 아픔은 개인의 게으름으로 돌릴 수 없는 일입니다. 교회는 그 짐을 함께 지고 (교회는 왜 필요한가?), 그리스도인은 정직한 일터와 공정한 사회를 만드는 데 힘써야 합니다. 일할 수 없는 사람의 값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며, 그 값은 줄어들지 않습니다.

더 생각해 보기

일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고 이웃을 섬기는 길입니다. 동시에 일은 사람을 구원하지 못하고, 사람의 가치를 증명해 주지도 못합니다. 전도자의 결론대로 일의 열매를 영원히 붙들 수는 없지만, 하나님이 주신 날 동안 자기 몫의 수고 가운데서 낙을 누리는 것은 가능합니다 (전 5:18). 쉼도 이 선물에 속합니다. 일곱째 날의 안식은 일이 우리의 주인이 아니라는 선언입니다. 쉼에 대해서는 왜 쉬어야 하는가?를 보십시오.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나는 내 일을 누구를 위해 하고 있습니까? 나는 일로 나의 가치를 증명하려 하지는 않습니까? 일자리가 없는 이웃에게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돈에 대한 생각은 돈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서 이어 읽을 수 있습니다.

성경과 고전 주석을 바탕으로, 역사적 기독교 신앙(사도신경, 니케아 신경)의 관점에서 쓴 글입니다. 그리스도인 사이에 견해가 갈리는 문제는 여러 견해를 함께 소개합니다. 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