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염려와 불안을 어떻게 이길 수 있는가?

짧은 답

성경은 염려하는 사람을 꾸짖기보다 염려를 맡길 분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시며, 기도는 불안을 그분께 가져가는 길이고, 그분의 평강은 느낌이 아니라 지켜 주심으로 주어집니다. 불안장애는 몸의 병처럼 치료받을 수 있는 병이므로 기도와 함께 의사와 상담자의 도움을 구하는 것은 믿음이 없다는 표시가 아닙니다.

성경의 답

성경에서 염려에 대해 가장 널리 알려진 말씀은 산상수훈에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걱정하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생명을 위해 너희가 무엇을 먹을까 혹은 무엇을 마실까, 너희 몸을 위해 너희가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생명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아니하냐?

마 6:25

공중의 날짐승들을 보라. 그것들은 씨 뿌리지도 아니하고 거두지도 아니하며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먹이시나니 너희는 그것들보다 훨씬 더 낫지 아니하냐?

마 6:26

이 말씀은 호통이 아니라 이유를 대는 말씀입니다. 염려하지 말라는 명령 뒤에는 늘 "너희 천부께서"라는 근거가 따라옵니다. 하나님이 아버지이시고 우리를 새보다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염려가 무엇을 해 주지 못하는지도 짚으십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자기 키에 일 큐빗을 더할 수 있겠느냐?" (마 6:27). 마지막 말씀은 현실적입니다.

그러므로 내일을 염려하지 말라. 내일이 자기 것들을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악은 그 날에 족하니라.

마 6:34

예수께서 괴로움이 없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루에는 그날의 괴로움이 있습니다. 다만 오늘의 몫만 지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기도로 이어 줍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서 기도와 간구로 너희가 요청할 것들을 감사와 더불어 하나님께 알리라.

빌 4:6

그리하면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 4:7

주목할 점은 약속의 내용입니다. 걱정거리가 사라진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평강이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고 합니다. 이 편지를 쓴 바울은 감옥에 있었습니다. 베드로도 같은 방향으로 말합니다. "너희의 모든 염려를 그분께 맡기라. 그분께서 너희를 돌보시느니라." (벧전 5:7). 맡기는 까닭은 의지가 강해서가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돌보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들은 이것을 정직한 기도로 남겼습니다. "내가 무서워할 때에 주를 신뢰하리이다." (시 56:3). 두려움이 없다고 하지 않고, 두려운 그날에 의지하겠다고 합니다. "네 짐을 주께 맡기라. 그러면 그분께서 너를 붙드시고 의로운 자가 흔들리는 것을 결코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시 55:22).

그리고 성경에는 불안 속에 있던 예수의 모습이 있습니다. 겟세마네에서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앞두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혼이 심히 슬퍼 죽을 지경이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마 26:38

조금 멀리 가사 얼굴을 대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오 내 아버지여, 가능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시고는

마 26:39

누가는 이때 "하늘로부터 한 천사가 그분께 나타나 그분을 강건하게 하더라."고 적습니다 (눅 22:43). 가장 오래된 사본 가운데 여럿에는 43-44절이 없지만, 마태와 마가가 전하는 예수의 고뇌는 분명합니다. 그분은 두려움을 느끼셨고, 그것을 숨기지 않고 아버지께 말씀드리셨습니다. 그리고 두려움이 곧바로 사라지지 않았는데도 기도하셨습니다. 히브리서는 그분이 "우리에게 계신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의 감정을 몸소 느끼지 못하시는 분이 아니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으되 죄는 없으신 분이시니라."라고 말합니다 (히 4:15). 불안에 떠는 사람 곁에는 그 두려움을 아시는 분이 계십니다.

교회의 증언

교회는 염려를 두 가지로 구분해 왔습니다. 매튜 헨리는 빌립보서 4장을 풀면서 부지런함으로 하는 염려와 두려움과 불신에서 나오는 염려를 나누고, 이 어지럽히는 염려의 치료책을 기도라고 말합니다. "이 어지럽히는 염려에 대한 치료책으로 끊임없는 기도가 권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평강에 대해서는 "환난 중에 죄를 짓지 않게, 또 그 아래서 낙심하지 않게 지켜 주며, 우리를 잔잔하게 하고 속사람에게 만족을 줍니다"라고 씁니다 매튜 헨리. 한 가지 덧붙여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옛 주석가들은 걱정이 지나쳐 몸과 마음이 병든 상태를 오늘날처럼 구별해서 말하지 않았고, 때로 염려를 곧바로 죄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 글은 그런 말을 병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적용하지 않습니다.

모든 염려를 금하신 것이 아니라는 점은 교부들도 분명히 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종이 필요한 것을 마련하려고 애쓰는 것을 보고 곧바로 주의 계명을 어긴다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주님께서도 친히 본을 보이시려고 전대를 가지고 다니셨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씁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정죄하시는 것은 사람의 방식으로 이런 것들을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것들 때문에 하나님의 군사로서 싸우지 않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크리소스토무스는 염려가 주는 고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염려와 근심만큼 영에 고통을 가져오는 것은 없습니다" 크리소스토무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묻습니다. "날마다 자기의 염려로 이미 충분한 짐을 지고 있지 않습니까?" 교회는 염려가 얼마나 무거운 짐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첫 물음에서, 살아서나 죽어서나 우리의 유일한 위로가 우리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는 사실이라고 답합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1문. 불안은 내가 모든 것을 붙들어야 한다는 느낌에서 자랍니다. 교회의 대답은 붙들고 계신 분이 따로 계신다는 것입니다.

원어로 보기

예수께서 쓰신 "염려하다"는 메림나오(μεριμνάω)입니다. 어원이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 말은 흔히 마음이 여러 갈래로 나뉘고 끌려다니는 모습과 연결해 설명합니다. 누가복음 10장에서 예수께서는 마르다에게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에 관하여 염려하고 근심하나"라고 하십니다 (눅 10:41). 그런데 같은 낱말이 좋은 뜻으로도 쓰입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빌립보 교회의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사람이라고 말하는데, 여기에 같은 동사가 쓰였습니다 (빌 2:20). 그러니 마음을 쓰고 돌아보는 일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마음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갈라지고, 오늘을 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쓴 "맡겨 버리라"는 에피립토(ἐπιρρίπτω), 곧 "위에 던지다"입니다. 짐을 조심스럽게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 그분 위에 던져 올려놓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빌립보서 4:7의 "지키시리라"는 프루레오(φρουρέω)인데, 도시를 지키는 보초와 초소를 떠올리게 하는 말입니다. 평강은 우리 마음 둘레에 서 있는 파수꾼으로 그려집니다. 우리가 평강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평강이 우리를 지킨다는 뜻입니다.

흔한 반론과 답

"예수께서 염려하지 말라고 명하셨으니, 불안한 것은 믿음이 없어서이고 죄다." 이 반론은 진지하게 받아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실제로 "염려하지 말라"고 명하셨고, 어떤 사람은 이 말씀을 듣고 불안한 자신을 더 책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문맥은 책망이 아니라 초대입니다. 예수께서는 같은 자리에서 "그러므로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렇게 입히시거든, 오 너희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물며 너희는 더 잘 입히지 아니하시겠느냐?"라고 부르시는데 (마 6:30), 믿음이 '없는' 자가 아니라 '적은' 자라고 하십니다. 이어서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모든 자들아, 너희는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고 하십니다 (마 11:28). 또 오늘날 말하는 불안장애는 마음먹기에 달린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심장 박동이나 수면, 몸의 긴장 반응까지 건드리는 병이며, 당뇨나 고혈압처럼 치료받을 수 있는 병입니다. 병을 앓는 사람에게 "더 믿으라"고만 하는 것은 성경이 가르친 바가 아닙니다. 겟세마네의 예수께서도 두려움을 느끼셨지만 죄가 없으셨습니다 (히 4:15). 두려움을 느끼는 것과 죄를 짓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약이나 상담을 받는 것은 하나님을 못 믿는다는 표시가 아닌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의사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동역자 누가를 "사랑받는 의사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인사하느니라."이라고 부르며 (골 4:14), 자주 아픈 디모데에게 몸을 위한 처방을 권합니다 (딤전 5:23). 엘리야가 낙심하여 죽기를 구했을 때 하나님이 처음으로 하신 일은 잠자게 하시고 먹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왕상 19:4-8).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기도뿐 아니라 의학, 상담, 가까운 사람들을 통해서도 도우신다고 믿습니다. 어떤 치료가 맞는지는 의사와 상의해서 정할 일이고, 약을 먹을지 말지가 믿음의 척도는 아닙니다.

"기도했는데도 불안이 사라지지 않는다." 이것은 정직한 아픔입니다. 겟세마네의 예수께서도 잔이 지나가기를 구하셨지만 잔은 지나가지 않았고, 대신 천사가 와서 힘을 주었습니다. 바울도 가시가 떠나기를 세 번 구했으나 "그분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나의 강한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해지느니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오히려 크게 기뻐하며 나의 연약한 것들을 자랑하리니 이것은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 위에 머무르게 하려 함이라."라는 대답을 들었습니다 (고후 12:9). 성경이 약속하는 것은 모든 괴로움이 즉시 사라진다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지켜 주시고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래 기도해도 불안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기도가 실패했다는 뜻이 아니라 다른 도움도 함께 필요하다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더 생각해 보기

불안을 이기는 길은 의지력으로 불안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불안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몇 가지 구체적인 걸음이 있습니다. 걱정을 막연하게 두지 말고 구체적으로 적어서 하나씩 기도로 올려 드립니다. 오늘의 몫만 생각하는 연습을 합니다. 잠, 식사, 움직임 같은 몸의 기초를 챙깁니다. 믿는 사람 한 명에게 사실대로 말합니다 (갈 6:2). 그리고 불안이 오래가거나 일상을 흔든다면 의사나 정신건강 전문가를 찾아가십시오. 그것은 약함이 아니라 지혜이며, 부끄러워할 일이 아닙니다. 만일 스스로를 해치고 싶은 생각까지 든다면 혼자 견디지 말고 지금 바로 주변 사람이나 응급 연락처, 한국에서는 자살예방상담전화 109에 연락하십시오.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지금 내가 가장 붙들고 있는 걱정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하나님께 정직하게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까? 내 곁에서 이 짐을 함께 질 사람은 누구입니까?

더 읽으려면 우울증은 믿음이 부족해서인가?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를 보십시오. 마태복음 6장 25-34절과 빌립보서 4장 4-9절을 천천히 소리 내어 읽는 것도 좋습니다.

출처

  1.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563 — 독일 개혁교회의 요리문답(129문). 제1문: 살아서나 죽어서나 유일한 위로는 무엇인가. 죄와 구원과 감사의 세 부분으로 신경, 성례, 십계명, 주기도문을 가르친다. 읽기

성경과 고전 주석을 바탕으로, 역사적 기독교 신앙(사도신경, 니케아 신경)의 관점에서 쓴 글입니다. 그리스도인 사이에 견해가 갈리는 문제는 여러 견해를 함께 소개합니다. 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