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정말 죄가 없으셨는가?
신약은 일관되게 예수께서 우리와 같은 시험을 받으셨으나 죄는 없으셨다고 증언하며, 교회는 이를 칼케돈 신조의 고백으로 이어 왔습니다. 성전에서의 분노나 가나안 여자와의 대화처럼 처음 읽으면 걸리는 장면들도 있지만, 본문을 찬찬히 살피면 죄라고 부를 근거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분의 무죄는 우리의 구원이 서 있는 자리와 맞닿아 있습니다.
성경의 답
신약의 여러 증인은 서로 다른 자리에서 같은 말을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를 우리의 대제사장이라 부르며 이렇게 씁니다.
우리에게 계신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의 감정을 몸소 느끼지 못하시는 분이 아니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으되 죄는 없으신 분이시니라.
히 4:15
바울은 이렇게 씁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 못한 그분을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게 하신 것은 우리가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고후 5:21
베드로는 "그분께서는 죄를 짓지 아니하시고 입에 교활함도 없으시며"라고 하고 (벧전 2:22), 요한은 "그분께서 우리의 죄들을 제거하려고 나타나신 것을 너희가 알거니와 그분 안에는 죄가 없느니라."고 합니다 (요일 3:5). 교회는 이 편지들을 예수와 함께 먹고 걷던 베드로와 요한의 증언으로 받아 왔습니다.
예수께서 직접 하신 말씀도 있습니다. 그분은 반대자들에게 "너희 중에 누가 내게 죄를 깨닫게 하겠느냐? 또한 내가 진리를 말할진대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요 8:46). 그분의 적들은 재판에서 그 일을 시도했습니다. 마태는 대제사장들과 공회가 "거짓 증거를 찾으매" 거짓 증인이 많이 왔으나 얻지 못했다고 기록합니다 (마 26:59-60). 빌라도는 "이에 빌라도가 수제사장들과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 잘못도 찾지 못하노라, 하매" 하고 말했고 (눅 23:4), 함께 못 박힌 한 강도도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합당한 보응을 받으니 참으로 공정하게 정죄를 받거니와 이 사람은 아무 잘못도 행하지 아니하였느니라, 하고" 하고 고백했습니다 (눅 23:41). 또 복음서 어디에도 예수께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거나 용서를 구하셨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제자들에게는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하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지만, 스스로는 그렇게 기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고 예수의 시험이 가짜였다는 뜻은 아닙니다. 복음서는 그분이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고 말합니다. 사십 일을 금식하여 주리신 뒤에 돌로 떡을 만들라는 유혹,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유혹, 절하면 세상 나라를 주겠다는 유혹이 왔습니다 (마 4:1-11). 예수께서는 매번 성경 말씀으로 대답하셨습니다. 첫 번째에는 "그분께서 응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바,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더라." 하셨습니다 (마 4:4). 겟세마네에서는 죽음 앞에서 괴로워하며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이르시되,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이 아니옵고 오직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눅 22:42
히브리서는 이 시험이 실제였다는 점이 우리에게 위로가 된다고 합니다.
그분께서 친히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구조하실 수 있느니라.
히 2:18
예수께서는 시험을 받지 않으신 분이 아니라 시험을 받고도 죄를 짓지 않으신 분입니다. 죄는 인간 본성의 일부가 아니라 그것을 일그러뜨린 것이므로, 죄가 없으시다고 해서 그분이 덜 사람이신 것은 아닙니다.
교회의 증언
교회는 이 증언을 신앙고백에 담았습니다. 451년 칼케돈 공의회는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시고, 죄를 제외하고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같으시다고 선언했습니다 칼케돈 신조.
교부들은 시험의 실재와 무죄를 함께 붙들려고 했습니다. 그레고리우스는 시험에 세 단계, 곧 암시와 즐거움과 동의가 있다고 풀이합니다. 우리는 죄 가운데 태어났기 때문에 시험을 받을 때 대개 즐거움이나 동의에 빠지지만, 그리스도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씁니다. "그분은 암시로는 시험을 받으실 수 있었으나 죄의 즐거움이 그분의 영혼을 갉아먹은 적은 결코 없었으며" 그레고리우스. 시험은 그분에게 밖에서 왔고, 안에서 호응하는 것이 없었다는 설명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가 왜 시험을 받으셨는지 묻고 이렇게 답합니다. "시험을 이기는 일에 있어서 도움으로만이 아니라 본보기로도 우리의 중보자가 되시기 위함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매튜 헨리는 히브리서 4장 15절을 풀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이 거룩하고 순결하실수록 그 본성상 죄를 짓기를 더 꺼리셨을 것이고 죄의 악에 대하여 더 깊은 인상을 가지셨을 것이며" 매튜 헨리. 죄가 없는 분은 죄의 압박을 모르는 분이 아니라, 죄를 가장 깊이 아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에 대해서는 이렇게 씁니다. "그분은 죄가 되셨습니다. 죄인이 아니라 죄, 곧 속죄제물, 죄를 위한 희생제물이 되셨습니다" 매튜 헨리.
원어로 보기
예수의 "시험"에 쓰인 말은 페이라조(πειράζω)입니다. 이 말은 "시험하다"와 "유혹하다"를 둘 다 뜻하는 말입니다. 같은 사건이 하나님 편에서는 믿음을 단련하는 시험이고 마귀 편에서는 넘어뜨리려는 유혹입니다. 마태복음 4장 1절에서 예수는 성령에게 이끌려 시험을 받으러 가시는데, 이 사건에서 성령은 시험의 자리를 허락하신 분이고 유혹하는 자는 마귀입니다. 그래서 같은 사건을 두 방향에서 말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4장 15절의 "죄는 없으시니라"는 코리스(χωρίς) 하마르티아스, 곧 "죄 없이" 또는 "죄를 제외하고"입니다. 우리와 같은 시험을 겪으시면서도 죄 없이 지내셨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또 고린도후서 5장 21절의 "알지도 못하신"에서 "알다"는 성경에서 흔히 몸소 겪어 안다는 뜻이므로, 죄를 몸소 행하지 않으셨다는 말로 이해됩니다.
흔한 반론과 답
"성전에서 채찍을 만들어 상을 엎으신 것과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은 분노가 아닌가?" 이 장면들은 가볍게 넘길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를 성전에서 내어 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을 엎으셨다고 기록합니다 (요 2:13-17). 그러나 모든 분노가 죄는 아닙니다. 바울은 "너희는 화를 내도 죄는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진노하지 말고"라고 말합니다 (엡 4:26). 마가복음은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 앞에서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므로 그분께서 근심하사 분노하시며 그들을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앞으로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그의 손이 다른 손과 같이 온전하게 회복되니라." 둘러보셨다고 기록합니다 (막 3:5). 그분의 분노는 하나님의 집이 이익의 장터가 된 데서 나왔고, 제자들은 이것을 시편의 말씀으로 기억했습니다 (요 2:17). 크리소스토무스는 예수께서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이렇게 하신 것이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 집의 품위를 지키는 일이었다고 풀이합니다 크리소스토무스.
무화과나무 이야기는 더 낯섭니다. 마가는 "멀리서 잎사귀 달린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시 그 나무에서 무엇을 찾을 수 있을까 하여 가셨으나 그것에 이르러 보시니 잎사귀 외에는 아무것도 없더라. 이는 아직 무화과의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더라."고 적기까지 합니다 (막 11:13). 교회의 전통적 풀이는 이것이 성전을 정화하는 이야기 사이에 끼워진, 열매 없는 신앙에 대한 행동으로 한 비유라는 것입니다. 매튜 헨리는 이것이 외식하는 자들과 유대 백성의 상태를 가리킨다고 봅니다 매튜 헨리. 크리소스토무스는 제자들을 위한 이적이었다고 하며 "그 이적을 생각하고 그것을 행하신 분을 경탄하십시오"라고 합니다 크리소스토무스. 나무는 도덕적 책임을 지는 존재가 아니므로 불의가 일어난 것도 아닙니다. 그래도 어려운 대목이라는 것은 인정해야 합니다.
"가나안 여자에게 대답하지 않으시고 '개'라고까지 부르신 것은 무례하고 차별이 아닌가?" 이 반론은 가장 강한 형태로 들을 가치가 있습니다. 여자는 딸을 위해 울며 도움을 청하는데 예수께서는 처음에 한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마 15:23), 이어서 자녀의 떡을 개들에게 던지는 것이 마땅치 않다고 하셨습니다 (마 15:26). 처음 읽으면 충격적입니다. 해석은 나뉩니다. 많은 교부는 이것이 여자의 믿음을 이끌어 내는 일이었다고 보았습니다. 크리소스토무스는 "그리스도께서 그토록 물러서 계신 까닭은, 그 여자가 무슨 말을 할지 아시고 그 여자의 큰 탁월함이 가려지지 않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하고 풀이합니다 크리소스토무스. 또 어떤 이들은 구원의 순서, 곧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라는 흐름이 여기서 드러나는 것이라고 봅니다 (롬 1:16). 헬라어에서 "개"는 집에서 기르는 작은 개를 뜻하는 말이라 거친 욕설보다 부드럽다고 보는 이들이 있으나, 이것이 얼마나 말투를 누그러뜨리는지는 논쟁이 있습니다. 여자의 대답이 실제로 그분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보는 현대 해석자들도 있는데, 참 사람이신 예수께서 마음이 움직이시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확실한 것은 결말입니다. 예수께서는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며 그녀를 칭찬하고 딸을 고쳐 주셨습니다 (마 15:28). 이 이야기에는 멸시로 내쫓거나 도움을 거절하는 결말이 없습니다. 여자는 고침을 받고 칭찬을 받습니다.
"죄를 지을 수 없었다면 시험은 가짜가 아니었나? 죄를 지을 수 있었다면 하나님이 죄를 지을 수 있다는 말인가?" 이것은 진짜 어려운 질문이며, 그리스도인들은 두 갈래로 답합니다. 두 답 모두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신 한 위격이라는 고백 안에 있습니다. 교회 역사에서 대다수 신학자는 그분이 죄를 지으실 수 없었다고 보았습니다. 시험을 받으신 분은 영원한 아들이시고, 죄를 짓는다면 그것은 그분 자신의 행위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시험의 압박은 그분의 인간 영혼에 실제로 닥쳤으며, 시험의 무게는 넘어질 가능성에 달린 것이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다른 쪽, 특히 근대 이후의 적지 않은 신학자는 그분이 인성 안에서 참으로 죄를 지을 수 있었으나 우리처럼 아버지를 신뢰하고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이기셨다고 봅니다. 이들도 신성이 죄를 지을 수 있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두 편 모두 그분이 죄를 짓지 않으셨다는 점과 시험의 압박이 실제였다는 점을 함께 고백합니다.
더 생각해 보기
예수의 무죄는 그분의 도덕적 탁월함을 칭찬하기 위한 교리가 아닙니다. 그분이 우리를 구하실 수 있는 자리에 서 계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구약에서 제물은 흠이 없어야 했고 (레 22:20), 히브리서는 그리스도께서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을 통해 자신을 점 없이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는 죽은 행위로부터 너희 양심을 얼마나 더 많이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겠느냐?" 그리스도의 피를 말합니다 (히 9:14). 자기 죄로 죽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 짊어질 수 없습니다. 또 그분이 정말 시험을 받으셨다는 것은, 우리가 유혹 앞에서 약할 때 기도할 대상이 구경꾼이 아니라 같은 길을 걸어 본 분이라는 뜻입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내 연약함을 아신다는 것을 믿습니까, 아니면 그분 앞에서는 완벽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느낍니까? 처음에 거슬렸던 이야기를 다시 읽는다면 무엇이 달리 보일까요?
더 읽으려면 예수는 왜 죽어야 했는가?와 예수는 하나님인가?를 보십시오. 히브리서 4장 14-16절을 천천히 읽는 것도 좋은 시작입니다.
관련 질문
- 예수는 누구인가?교회는 예수를 약속된 메시야요 하나님의 아들이며 주님이시라고 고백해 왔습니다. 칼케돈 공의회의 말로는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신 한 분입니다. 이것은 그분을 가장 가까이서 따른 사람들이 증언한 것이며, 예수께서 직접 던지신 질문 앞에서 지금도 모든 사람이 답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 예수는 왜 죽어야 했는가?교회는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고 고백해 왔습니다. 그 죽음은 하나님이 죄를 가볍게 보지 않으신다는 표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이 죄인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보여 주는 표입니다. 십자가가 어떻게 구원하는지에 대해서는 몸값, 승리, 희생 제사, 대신 받으신 형벌, 사랑의 계시 같은 여러 그림이 있지만, 그것이 우리를 위한 일이며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왔다는 데에는 모두 한 목소리입니다.
- 예수는 하나님인가?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 사람이시라고 고백해 왔습니다. 교회는 이것이 후대에 덧붙인 교리가 아니라 신약의 증언을 따라 니케아 공의회가 정리한 것이라고 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고, 아들은 아버지와 구별되면서도 같은 본질을 가지신다는 것이 그 뜻입니다.
- 하나님은 왜 사람이 되셨는가?교회는 영원하신 아들께서 사람이 되셨다고 고백합니다. 그 이유로 성경은 하나님을 알리시려는 것,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서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것, 우리의 자비로운 대제사장이 되시려는 것을 말합니다. 크리스마스는 하나님이 멀리서 구경하지 않으시고 우리 곁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관련 주제
출처
- 칼케돈 공의회, 칼케돈 신앙정의 451 —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시다. 읽기
성경과 고전 주석을 바탕으로, 역사적 기독교 신앙(사도신경, 니케아 신경)의 관점에서 쓴 글입니다. 그리스도인 사이에 견해가 갈리는 문제는 여러 견해를 함께 소개합니다. 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