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한 사람은 구원받을 수 있는가?
성경은 자살을 용서받지 못할 죄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구원은 생애의 마지막 행동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달려 있으며, 한 사람의 마지막 순간을 아시고 판단하시는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동시에 생명은 하나님의 선물이며, 지금 죽음을 생각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그가 살아서 도움을 받는 것입니다.
성경의 답
먼저 꼭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지금 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을 하고 있다면, 이 글을 더 읽기 전에 바로 도움을 청하십시오. 한국에서는 109(자살예방상담전화, 24시간)나 1588-9191(생명의전화)로 전화할 수 있고, 위급할 때는 119나 112에 바로 연락하십시오. 다른 나라에 있다면 그 지역의 위기상담전화나 응급 번호로 전화하십시오.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지금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것 같아도, 도움을 받으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이 질문은 흔히 사랑하는 사람을 자살로 잃은 사람들이 묻습니다. 그 슬픔 위에 ‘그 사람은 구원받지 못했다’는 말까지 얹히면 상처는 훨씬 깊어집니다. 그래서 이 글은 성경이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는 것을 조심스럽게 나누어 보려 합니다.
성경은 먼저 생명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고 (창 1:27), 십계명은 그 생명을 지키라고 명령합니다.
너는 살인하지 말라.
출 20:13
교회는 오래전부터 이 계명이 다른 사람의 생명뿐 아니라 자기 생명도 지키라는 뜻이라고 가르쳐 왔습니다. 바울은 "도대체 무슨 말이냐? 너희 몸이 너희가 하나님에게서 받은바 너희 안에 계신 성령님의 전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니"고 말합니다 (고전 6:19). 우리 생명은 하나님께 받은 것이고, 그분께 소중합니다. 모세는 백성 앞에 생명과 사망을 두고 "내가 이 날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로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또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었나니 그러므로 너와 네 씨가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라고 권했습니다 (신 30:19).
그러나 성경은 죽고 싶을 만큼 깊은 절망도 숨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는 광야의 한 나무 아래에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스스로 하룻길을 가서 광야로 들어가 로뎀나무에 이르러 그 밑에 앉아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오 주여, 족하오니 이제 내 생명을 취하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아니하나이다, 하고
왕상 19:4
하나님은 그를 꾸짖지 않으셨습니다. 천사가 와서 그를 어루만지며 먹을 것을 주었고, 그는 먹고 자고 다시 먹었습니다 (왕상 19:5-7). 하나님은 지친 몸부터 돌보셨고, 그다음에 세미한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욥도 자기가 태어난 날을 저주하며 "어찌하여 그분께서 고통 당하는 자에게 빛을 주셨으며 혼이 괴로운 자에게 생명을 주셨는가?"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욥 3:20). 시편 88편은 위로 없이 어둠으로 끝납니다 (시 88:18). 이런 기도가 성경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을 버리지 않으신다는 뜻입니다. 엘리야도 욥도 그 밤을 지나 다시 살았습니다.
그렇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성경은 구원이 사람의 마지막 행동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달려 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 그것은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니라." 구원을 얻습니다 (엡 2:8). 그리고 바울은 무엇도 그 사랑을 끊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정사들이나 권능들이나 현재 있는 것들이나 장래 있을 것들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창조물이라도 능히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지 못하리라.
롬 8:38-39
성경 어디에도 자살을 용서받지 못할 죄라고 부르는 곳은 없습니다. 예수께서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고 하신 것은 "성령님을 대적하여 신성모독하는 자는 결코 용서받지 못하고 영원한 정죄의 위험에 처해 있느니라, 하시니라." 죄입니다 (막 3:29). 많은 해석자는 이것을 그리스도를 증언하시는 성령을 끝까지 완강히 거부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절망 속에서 일어난 한 행동을 가리킨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어떤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확언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지만 여호와는 "주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나 키의 크기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주는 사람이 보는 것처럼 보지 아니하나니 사람은 겉모습을 보나 주는 마음을 보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삼상 16:7). 판단은 그분께 속해 있습니다.
교회의 증언
교회는 오랫동안 자살을 매우 엄하게 다루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도성』 제1권에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 자기 자신을 죽이는 일도 금한다고 논증했고, 이 가르침은 천 년 넘게 서방 교회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중세 교회는 이렇게 세상을 떠난 사람의 교회 장례를 거절하곤 했고, 유족은 슬픔에 더해 수치까지 짊어져야 했습니다. 그 엄격함은 생명을 지키려는 뜻에서 나왔지만, 남은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개신교의 매튜 헨리도 같은 계명을 풀면서 "우리 자신의 생명을 해치는 것도 여기서 금지됩니다"라고 씁니다 매튜 헨리.
가톨릭 교회는 전통적으로 자살을 중대한 죄로 가르쳐 왔고, 오늘날의 『가톨릭 교회 교리서』(2280-2283항)도 우리는 생명의 주인이 아니라 관리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교리서는 심한 정신적 고통이나 큰 두려움이 그 사람의 책임을 줄일 수 있다고 덧붙입니다. 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들의 구원에 대해 절망하지 말아야 하며, 하나님은 그분만 아시는 길로 회개의 기회를 주실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교회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1983년에 개정된 교회법은 자살을 교회 장례를 거절하는 사유로 더는 꼽지 않습니다.
개신교 안에서는 생각이 갈립니다. 어떤 교회들은 자살이 생명을 빼앗는 죄이고 회개할 시간도 남기지 않으므로 구원받을 수 없다고 가르쳐 왔습니다. 한국 교회에서도 자주 듣는 견해이며,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으려는 진지한 뜻이 담겨 있습니다.
다른 많은 개신교인은 구원이 마지막 순간의 고백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에 달려 있다고 강조합니다. 루터는 『탁상담화』(222번, 1532년)에서 이렇게 세상을 떠난 이들이 반드시 멸망한다는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죽기를 원했다기보다 마귀의 힘에 짓눌린 것이며, 숲에서 강도에게 살해당한 사람과 같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는 이 생각을 일반 신자들에게 가르치지는 말고 옛 장례 관습도 지키라고 했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우리의 유일한 위로가, 몸과 영혼이 다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데 있다고 고백합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1문. 매튜 헨리는 로마서 8장을 풀며 이렇게 씁니다.
아무도 그리스도를 신자에게서 빼앗을 수 없고, 아무도 신자를 그분에게서 빼앗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매튜 헨리
여러 전통이 함께 고백하는 것도 있습니다. 생명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자살은 결코 고통의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 한 사람의 영원한 운명을 판단하는 일은 하나님께 속한다는 것, 그리고 교회는 남은 사람들을 정죄하지 말고 위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원어로 보기
출애굽기 20:13의 동사는 라차흐(רָצַח)입니다. 구약에서 이 말은 주로 고의로 사람을 죽이는 일에 쓰이지만, 실수로 사람을 죽게 한 경우에도 쓰입니다 (민 35:11). 그만큼 사람의 생명 자체를 지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누구든지 사람의 피를 흘리는 자는 사람에 의해 자기 피를 흘리리니 이는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들었기 때문이니라." 지으셨기 때문에 (창 9:6), 어떤 생명도 가볍지 않습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의 생명도 그렇습니다.
로마서 8:39의 ‘끊다’는 코리조(χωρίζω), 곧 ‘갈라놓다’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고 하실 때의 ‘나누다’도 같은 말입니다 (마 19:6).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그 백성을 묶은 사랑을 사망조차 갈라놓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흔한 반론과 답
"자살은 자기를 죽이는 살인이고, 죽은 뒤에는 회개할 기회가 없으니 구원받을 수 없다." 이 견해는 죄를 진지하게 여기고, 무엇보다 사람들이 그 길로 가지 않도록 막으려는 마음에서 나왔습니다. 생명을 끊는 일이 하나님 앞에서 결코 가볍지 않다는 점은 맞습니다. 그러나 구원이 죽기 전에 모든 죄를 하나하나 고백했는지에 달려 있다면, 사고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신자도 마지막 순간의 분노나 미처 고백하지 못한 죄 때문에 구원을 잃게 됩니다. 성경은 구원을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정죄함이 없나니 그들은 육신을 따라 걷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걷느니라."라고 말합니다 (롬 8:1). 또 자살로 세상을 떠나는 많은 사람은 우울증 같은 병으로 판단이 흐려진 상태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분께서는 우리의 구조를 아시며 우리가 먼지임을 기억하시는도다."십니다 (시 103:14). 우리는 그 마지막 순간에 그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합니다. 누구도 그가 구원받았다고 확언할 수 없고, 구원받지 못했다고 선고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를 그리스도의 긍휼에 맡길 뿐입니다.
"그렇게 말하면 자살을 부추기는 것이 아닌가?" 이 걱정은 진지하고 옳습니다. 이 소망은 이미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유족을 위한 위로이지, 살아 있는 사람에게 열어 두는 출구가 아닙니다. 자살은 결코 고통의 해결책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 땅에서 하나님이 주실 회복의 시간을 끊어 버립니다. 내가 없으면 다들 더 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도,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 고통이 하는 말입니다. 그 생각을 혼자 품지 말고 오늘 누군가에게 털어놓거나 109로 전화하십시오. 살아 있는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분명합니다. 생명을 택하라는 것입니다. 절망은 앞으로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고통이, 때로는 병이 하는 말이지 사실이 아닙니다. 위기를 지나 도움을 받은 많은 사람이 그때 살아 있어서 다행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의사와 상담자와 교회와 곁에 있는 사람들을 통해 당신을 붙드시기 원하십니다.
더 생각해 보기
사랑하는 사람을 이렇게 잃었다면 먼저 이 말을 드리고 싶습니다.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자살에는 대개 여러 원인이 얽혀 있고, 남은 사람이 모든 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왜’라는 질문에 끝내 답을 얻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여호와는 "주께서는 상한 마음을 가진 자들에게 가까이 계시며 통회하는 영을 가진 자들을 구원하시는도다."십니다 (시 34:18). 섣부른 판결을 내리는 말에 마음을 내주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사람을 우리보다 훨씬 긍휼이 크신 하나님의 손에 맡겨 드릴 수 있습니다. 슬픔이 너무 무거울 때는 유족 모임이나 상담의 도움을 받으십시오.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이 내 가장 어두운 순간보다 크다고 믿습니까? 내 주변에 말없이 무너지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까? 오늘 그에게 안부를 물을 수 있을까요?
더 읽으려면 우울증은 믿음이 부족해서인가?와 슬픔을 어떻게 견딜 수 있는가?를 보십시오. 열왕기상 19장을 천천히 읽어 보는 것도 좋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말씀드립니다. 지금 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이 든다면, 지금 바로 109(자살예방상담전화, 24시간)나 1588-9191(생명의전화)로 전화하고, 위급하면 119나 112에 연락하십시오. 다른 나라에서는 그 지역의 위기상담전화나 응급 번호로 전화하십시오. 오늘 믿을 만한 한 사람에게 지금의 마음을 말하십시오. 당신의 생명은 하나님께 소중합니다.
관련 질문
- 우울증은 믿음이 부족해서인가?아닙니다. 우울증은 몸과 마음이 함께 앓는 병이지, 믿음에 대한 판결이 아닙니다. 엘리야와 시편 기자와 예레미야도 깊은 어둠을 지났고, 하나님은 그들을 꾸짖기보다 먼저 돌보셨습니다. 기도와 교회와 함께 의사와 상담의 도움을 받는 것은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 슬픔을 어떻게 견딜 수 있는가?슬픔은 믿음이 없다는 표시가 아니라 사랑의 다른 얼굴입니다. 예수께서도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셨고, 성경은 소망 없는 사람처럼 슬퍼하지 말라고 할 뿐 슬퍼하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다. 슬픔에는 시간이 걸리며, 하나님은 마음이 상한 사람 가까이 계시고, 교회는 우는 사람과 함께 웁니다.
- 구원은 잃을 수 있는가?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이 전적으로 그리스도께 달려 있다는 점, 그리고 성경의 경고가 실제라는 점에는 뜻을 같이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믿는 사람이 끝내 떨어져 나갈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개혁파, 루터파, 웨슬리·아르미니우스 전통, 가톨릭과 정교회가 서로 다르게 답해 왔습니다. 이 글은 각 입장을 가장 좋은 모습으로 소개하고, 불안한 사람에게 성경이 주는 위로를 함께 살핍니다.
- 용서받지 못할 죄란 무엇인가?예수께서 말씀하신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성령께서 분명히 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알면서도 마귀의 일이라 고집하며 그 용서의 길 자체를 거부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교회는 이것을 한순간의 실수나 의심, 떠오르는 불경한 생각과 구별해 왔습니다. 이 죄가 아닐까 두려워하는 마음은 하나님이 아직 그 사람 안에서 일하고 계신다는 표로 읽혀 왔습니다.
관련 주제
출처
-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563 — 독일 개혁교회의 요리문답(129문). 제1문: 살아서나 죽어서나 유일한 위로는 무엇인가. 죄와 구원과 감사의 세 부분으로 신경, 성례, 십계명, 주기도문을 가르친다. 읽기
성경과 고전 주석을 바탕으로, 역사적 기독교 신앙(사도신경, 니케아 신경)의 관점에서 쓴 글입니다. 그리스도인 사이에 견해가 갈리는 문제는 여러 견해를 함께 소개합니다. 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