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용서받지 못할 죄란 무엇인가?

짧은 답

예수께서 말씀하신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성령께서 분명히 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알면서도 마귀의 일이라 고집하며 그 용서의 길 자체를 거부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교회는 이것을 한순간의 실수나 의심, 떠오르는 불경한 생각과 구별해 왔습니다. 이 죄가 아닐까 두려워하는 마음은 하나님이 아직 그 사람 안에서 일하고 계신다는 표로 읽혀 왔습니다.

성경의 답

이 말씀은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신 직후에 나옵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저가 바알세불을 지폈다" 하며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했습니다 (막 3:22). 예수께서는 사단이 사단을 쫓아내면 그 나라가 설 수 없다고 대답하시고 (마 12:25-26), 자신은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영을 힘입어 마귀들을 내쫓으면 하나님의 왕국이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셨습니다 (마 12:28).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든 죄는 사람들의 아들들이 용서받고 또 그들이 신성모독할 때 쓰는 신성모독도 다 용서받되 성령님을 대적하여 신성모독하는 자는 결코 용서받지 못하고 영원한 정죄의 위험에 처해 있느니라, 하시니라.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그가 부정한 영에 사로잡혔다, 하였기 때문이더라.

막 3:28-30

마태는 이 말씀을 이렇게 전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갖 종류의 죄와 신성모독은 사람들이 용서받되 성령님을 대적하여 신성모독하는 것은 사람들이 용서받지 못하고 또 누구든지 말로 사람의 아들을 대적하면 그는 용서받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님을 대적하면 이 세상에서나 오는 세상에서나 그는 용서받지 못하리라.

마 12:31-32

먼저 눈여겨볼 것은 말씀의 첫머리입니다. "모든 죄와 …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용서의 폭을 먼저 넓게 선언한 뒤에 하나의 예외를 둡니다. 인자, 곧 예수 자신을 거역하는 말까지도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외가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마가는 직접 이유를 덧붙입니다.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그가 부정한 영에 사로잡혔다, 하였기 때문이더라." (막 3:30). 문맥은 분명합니다. 눈앞에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일을 보고 그것이 하나님의 일임을 알면서도 사단의 일이라 부른 것입니다. 이것은 의심하거나 질문하는 것과 다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길로 보이는 바로 그 일을 악으로 부르며 등을 돌리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용서받지 못할 사람처럼 보이던 이들이 용서받은 예도 보여 줍니다. 바울은 자신이 "내가 전에는 신성모독하는 자요, 핍박하는 자요, 해를 끼치는 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얻게 됨은 내가 믿지 아니하는 가운데 알지 못하고 그것을 하였기 때문이라." 긍휼을 입었다고 증언합니다 (딤전 1:13). 예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모든 자는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요 6:37).

교회의 증언

교회는 이 말씀을 크게 세 가지로 풀어 왔습니다. 모두 성경 본문의 일부를 붙들고 있습니다.

첫째,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것.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문제를 성경 전체에서 가장 어려운 물음의 하나로 여겼습니다. 그의 결론은 이렇습니다. 믿는 자의 첫째 은택은 성령 안에서의 죄 사함이므로, "이 값없는 은혜의 선물을 회개하지 않는 마음이 거스르니, 회개하지 않음 자체가 이 세상에서도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할 성령을 거스르는 훼방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그러나 곧 덧붙입니다. 누구든지 육신으로 사는 동안은 그 회개하지 않음을 심판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회개로 인도하는 동안에는 아무에 대해서도 절망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용서가 막히는 것은 하나님이 거절하셔서가 아니라 사람이 용서를 구하지 않는 상태로 끝까지 머물렀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일을 알고도 악으로 몰아 대적하는 것. 히에로니무스는 하나님의 일을 분명히 알아보고 그 능력을 부인할 수 없는데도 시기에 사로잡혀 그것을 거짓으로 거역하는 사람에 대해 말합니다 히에로니무스. 인자를 거역하는 말은 그분의 육신이 보잘것없어 보이기에 걸려 넘어질 수 있는 일이지만, 성령의 일을 사단의 일로 부르는 것은 알고도 하는 완악함이라는 것입니다. 이 읽기에서는 이 죄가 예수의 사역을 직접 본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역사적 사건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고, 지금도 비슷한 완악함이 가능하다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 읽기들을 모아 절망이나 완고함처럼 회개로 이끄는 것을 일부러 물리치는 고의적 악의의 죄로 다루었고, 오늘날 가톨릭 교리서는 이것을 하나님의 자비를 일부러 거절하는 일로 설명합니다.

셋째, 받은 은혜를 거슬러 돌아서는 것. 아우구스티누스는 산상 설교 주해에서, 성령의 은혜를 받은 뒤 악의와 시기로 형제 사랑을 공격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조심스럽게 묻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그러나 만년에 자기 저술을 돌아본 책에서 이것을 확실한 주장으로 한 것이 아니라고 하며, 그런 완악함 속에서 생을 마치는 경우로 한정했습니다.

매튜 헨리는 목회자의 눈으로 이 말씀을 읽습니다. "겸손하고 양심적인 신자들은 때로 자기가 용서받지 못할 죄를 범했다고 생각하는 시험을 받는 반면, 그 죄에 가장 가까이 이른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 좀처럼 두려움을 갖지 않습니다" 매튜 헨리. 또 이렇게 씁니다. "떨며 통회하는 죄인은 이것이 자기 경우가 아니라는 증거를 자기 안에 가지고 있습니다" 매튜 헨리.

원어로 보기

"훼방"은 헬라어 블라스페미아(βλασφημία)입니다. 사람이나 하나님을 해치는 말, 곧 모독을 가리킵니다. 신약에서는 하나님을 향한 모독뿐 아니라 사람에 대한 중상에도 쓰입니다. 이 본문에서 이 말은 입에서 나온 한마디보다 하나님의 일을 대하는 마음의 방향을 가리킵니다. 예수께서도 곧이어 "오 독사들의 세대야, 너희가 악하니 어찌 선한 것들을 말할 수 있겠느냐? 입은 마음에 가득한 것을 말하느니라."고 하십니다 (마 12:34).

"사하심을 얻다"는 아피에미(ἀφίημι)입니다. "놓아 보내다"라는 뜻이며, 빚이나 짐을 놓아 주는 모습을 담습니다. 이 낱말이 "얻지 못한다"는 부정과 함께 쓰이면 풀려나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이 됩니다. 이 말씀의 무게는 하나님이 풀어 주실 수 없다는 데 있다기보다, 풀려나기를 거부하는 마음이 있는 곳에서는 풀려남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고 많은 해석자가 읽습니다.

흔한 반론과 답

"용서받지 못할 죄가 있다면, 하나님의 은혜에도 한계가 있다는 말이 아닌가?" 이 질문은 정직하고 날카롭습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모든 죄를 덮기에 충분하다고 고백하면서 동시에 용서되지 않는 죄가 있다고 한다면 서로 맞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교회의 답은 이렇습니다. 문제는 그리스도의 피의 부족이 아니라, 그 용서를 받는 길 자체를 끝내 거부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매튜 헨리는 히브리서 6장을 풀며 "그리스도의 피가 이 죄를 사하심을 얻기에 충분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이 죄는 그 본질상 회개와 회개로 이끄는 모든 것에 정면으로 맞서기 때문입니다"라고 씁니다 매튜 헨리. 문을 걸어 잠근 사람에게 열린 문이 소용없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이것은 예수께서 이유를 직접 풀어 주시지 않은 부분에 대한 해석이며, 성경은 "영원한 죄"라고만 말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저주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내가 그 죄를 범했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자주 하는 두려움 가운데 하나입니다. 우선 분명히 말할 것이 있습니다. 원치 않게 떠오르는 불경한 생각이나, 괴로움과 분노 속에서 하나님께 쏟아낸 말, 의심은 이 죄가 아닙니다. 시편 기자들도 하나님께 거칠게 항의했습니다. 이 죄를 범한 사람은 대개 두려워하지 않으며, 두려움에 떨며 용서를 구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여전히 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하시고 (시 34:18) 통회하는 마음을 멸시하지 않으신다는 약속이 있습니다 (시 51:17). 또한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들을 자백하면 그분께서는 신실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느니라."라고 합니다 (요일 1:9). 매튜 헨리는 참으로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이들은 이 죄를 범하지 않았음을 확신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회개와 믿음이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매튜 헨리. 물론 이것은 마음을 읽는 증명이 아니라 성경이 주는 근거 있는 위로입니다. 같은 생각이 끊임없이 되풀이되어 일상이 힘들 만큼 괴롭다면, 믿을 만한 목회자나 상담자와 이야기하십시오. 이 두려움은 신앙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마음이 지쳐서 오는 경우도 많습니다.

"히브리서 6장과 요한일서 5장에도 돌이킬 수 없는 죄가 나오지 않는가?" 그렇습니다. 히브리서는 한번 비췸을 얻고 성령에 참여한 뒤에 "만일 떨어져 나가면 다시 그들을 새롭게 하여 회개에 이르게 함이 불가능하니 그들은 자기들을 위해 하나님의 아들을 새로이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그분을 모욕하느니라."라고 합니다 (히 6:4-6). 요한은 "어떤 사람이 자기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짓는 것을 보거든 그는 간구할 것이요, 그러면 그분께서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짓지 아니하는 자들로 인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는데 나는 그가 그것으로 인해 기도하라고 말하지 아니하노라."고 합니다 (요일 5:16). 이 본문들을 어떻게 이해할지는 교회 안에서 나뉩니다. 알미니우스 전통은 참 신자도 끝내 그리스도를 버릴 수 있다는 경고로 읽고, 개혁파는 이 경고가 참 신자에게는 인내의 수단이 되며 그렇게 떨어져 나간 사람은 처음부터 참되게 속하지 않았다는 뜻이라고 읽습니다 (구원은 잃을 수 있는가? 참고). 요한은 "사망"이 무엇인지 풀지 않고, 기도하지 말라고 명령하지도 않습니다. 두 본문 모두 이 죄를 연약함이나 일시적 타락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알고도 공공연히 버리는 것으로 서술한다는 점에서는 대체로 일치합니다. 매튜 헨리는 히브리서 6장을 두고, 이 대목 때문에 낙심하는 겸손한 죄인은 그럴 근거가 없으며, 타락했다가 회개하는 이들을 낙심시키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말합니다 매튜 헨리.

더 생각해 보기

이 말씀은 두려움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경고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대하는 마음이 완고해지지 않도록, 그리고 우리를 부르시는 성령의 음성에 귀를 닫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성령은 "그분께서 오셔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꾸짖으시리라." 책망하시는 분입니다 (요 16:8). 죄를 깨닫고 마음이 아프다면, 그것은 성령이 아직 일하고 계시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픔이 가야 할 곳은 절망이 아니라 그리스도입니다.

스스로 물어볼 수 있습니다. 나는 용서를 구하기를 미루는 마음을 품고 있지는 않습니까? 내게 오는 자를 결코 내어 쫓지 않으신다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나는 믿고 있습니까? 이 죄를 두려워하는 누군가가 곁에 있다면, 나는 그에게 어떤 말을 해 줄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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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고전 주석을 바탕으로, 역사적 기독교 신앙(사도신경, 니케아 신경)의 관점에서 쓴 글입니다. 그리스도인 사이에 견해가 갈리는 문제는 여러 견해를 함께 소개합니다. 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