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십일조는 꼭 해야 하는가?

짧은 답

십일조는 구약 율법에서 수확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게 한 규정입니다. 신약은 그리스도인에게 이 비율을 율법으로 명하지 않고, 즐거운 마음으로, 형편에 따라, 넉넉하게 드리라고 가르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십일조를 지금도 지켜야 할 기준으로 보는 쪽과 자유로운 헌신의 출발점으로 보는 쪽으로 나뉘지만, 억지로나 두려움으로 드리지 말아야 하고 가난한 이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점에는 모두 동의합니다.

성경의 답

십일조는 "십분의 일"이라는 뜻입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은 땅의 소산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땅의 모든 십일조 곧 땅의 씨나 나무 열매의 십일조는 주의 것이니 그것은 주께 거룩하니라.

레 27:30

이 십일조는 먼저 성막과 성전에서 섬기는 레위인의 몫이었습니다. 레위인에게는 땅의 분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민 18:21). 그러나 십일조는 제사장의 생계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명기는 삼 년마다 한 번 십일조를 성읍에 쌓아 두고 이렇게 쓰게 합니다.

(너와 함께 나누는 몫이나 상속 재산이 없는) 레위 사람과 네 성문 안에 거하는 나그네와 아버지 없는 자와 과부가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할지니라. 그리하면 주 네 하나님께서 네가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서 네게 복을 주시리라.

신 14:29

십일조에는 예배와 사회 안전망이라는 두 얼굴이 있었습니다. 또 이 규정보다 앞서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얻은 것의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고 (창 14:20), 야곱도 벧엘에서 하나님께 십분의 일을 드리겠다고 서원했습니다 (창 28:22). 이 두 사건은 율법 이전에도 이런 관습이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예언자 말라기는 백성이 이 의무를 소홀히 하자 책망합니다.

만군의 주가 말하노라. 너희는 모든 십일조를 창고로 가져와 내 집에 먹을 것이 있게 하고 이제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너희를 위해 하늘의 창들을 열고 받을 곳이 없도록 너희에게 복을 쏟아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말 3:10

이 말씀은 언약 백성 이스라엘 전체에게 주어진 것이고, 약속된 복도 그 언약 안에서의 복이었다는 점을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께서는 십일조를 폐하시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박하와 회향과 근채까지 십일조를 바치면서 더 중요한 것을 버렸다고 책망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바치되 율법의 더 중대한 문제인 판단의 공의와 긍휼과 믿음은 무시하였도다. 너희가 마땅히 이것들을 행하였어야 하거니와 다른 것도 행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말아야 하느니라.

마 23:23

예수께서는 십일조를 인정하시되 정의와 긍휼과 신실함을 더 앞에 두십니다. 십일조가 지금도 기준이라고 보는 이들은 이 인정을 중요하게 여기고, 다른 이들은 이 말씀이 십자가 이전에 율법 아래 있던 사람들에게 하신 것이라는 점을 짚습니다.

신약의 편지들에는 그리스도인에게 십분의 일을 명하는 구절이 없습니다. 대신 바울은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는 연보를 이야기하며 마음가짐을 가르칩니다.

저마다 자기 마음속에 정한 대로 낼 것이요,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거이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고후 9:7

마게도냐 교회는 "극한 가난" 속에서도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닿는 데까지 하였을 뿐 아니라 참으로 힘에 넘치도록 자원하여 하였고" 드렸습니다 (고후 8:2-3). 그리고 바울은 기준을 이렇게 밝힙니다.

먼저 자원하는 마음만 있으면 사람이 가진 것에 따라 주께서 그것을 받으실 것이요, 그가 갖지 아니한 것은 받지 아니하시리라.

고후 8:12

또 "주의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하나님께서 자기를 형통하게 하신 대로 자기 곁에 모아 두어 내가 갈 때에 모으는 일이 없게 하라." 하라는 말씀은 (고전 16:2), 정기적이고 소득에 비례하는 드림을 가르칩니다. 복음 전하는 이들이 복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고전 9:14).

교회의 증언

이 질문에 대해 교회는 한 가지로 답해 오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역사가는, 처음 몇 세기의 그리스도인들이 자발적인 헌금과 구제로 교회를 지탱했고, 소득의 십분의 일을 정기적으로 바치는 일은 이후 서서히 교회의 관습과 규정이 되었다고 봅니다. 중세 서방 교회에서는 십일조가 법으로 거두는 세금처럼 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가톨릭 교회는 신자가 교회의 물질적 필요를 채울 책임이 있다고 가르치되 정해진 비율을 명하지 않으며, 개혁 교회의 여러 전통과 많은 복음주의 교회는 십일조를 가르칩니다. 어떤 교회는 이를 지켜야 할 의무로, 어떤 교회는 권장하는 기준으로 말합니다.

교부들은 마태복음 23:23에서 균형을 찾았습니다. 위(僞)크리소스토무스는 십일조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이렇게 말합니다. "십일조를 바치는 것은 제사장들의 부양을 위해 세우신 것으로, 제사장들은 영적인 것으로 백성을 섬기고 백성은 육적인 것으로 제사장들에게 공급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위(僞)크리소스토무스. 한편 오리게네스는 예수의 말씀을 듣고 작은 것의 십일조를 소홀히 하는 사람이 생길까 봐 예수께서 "신중하게 덧붙이십니다"라고 풀이합니다 오리게네스. 십일조를 가볍게 보지도, 그것으로 의로움을 대신하지도 말라는 뜻입니다.

매튜 헨리는 레위기 27:30을 풀면서 십일조가 무엇을 고백하는 일이었는지 짚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렇게 "자기들이 누리는 풍성함에 대해 그분께 감사를 드렸으며, 그것이 계속되도록 그분의 은총을 구하였습니다" 매튜 헨리. 또 고린도후서 9:7에서는 "많든 적든 도움은 아끼지 않고 즐거이 자유롭게 주어져야 합니다"라고 합니다 매튜 헨리.

원어로 보기

십일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아세르(מַעֲשֵׂר)는 "열"을 뜻하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헬라어 신약에서 십일조를 드리는 일은 아포데카토오(ἀποδεκατόω)라고 하는데, 이 동사는 마태복음 23:23과 누가복음 11:42, 18:12에서는 바리새인들에 관해, 히브리서 7:5에서는 레위 자손에 관해 쓰였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이를 명령으로 쓰는 곳은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신약이 십일조를 율법과 함께 지난 시대의 일로 본다고 하고, 다른 이들은 예수께서 이를 부정하지 않으셨으니 그 원리가 이어진다고 봅니다.

고린도후서 9:7의 "즐겨 내는 자"는 힐라로스(ἱλαρός), "즐거운, 유쾌한"이라는 말입니다. 영어의 hilarious가 여기서 나왔습니다. 하나님은 드리는 금액보다 드리는 이의 마음의 표정을 보신다는 뜻입니다. 또 바울이 연보를 가리켜 쓰는 말 가운데 하나는 카리스(χάρις), 곧 "은혜"입니다 (고후 8:1, 9). 드림은 은혜를 받은 사람이 은혜로 응답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흔한 반론과 답

"말라기 3장은 십일조를 안 내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고 저주를 받는다고 하지 않는가?" 이 본문은 강력하고, 많은 신자가 이 말씀에 순종하며 복을 경험했다고 증언합니다. 다만 몇 가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이 말씀은 언약 아래 있던 이스라엘 나라에 주어졌고, 십일조는 성전을 유지하고 레위인과 가난한 이를 먹이는 제도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 원리가 지금도 유효하다고 보며, 다른 이들은 율법 아래의 규정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다고 봅니다 (히 7:12). 어느 쪽이든, 이 말씀을 하나님이 값을 받고 복을 파시는 거래로 읽는 것은 성경의 은혜의 복음과 맞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거래의 상대가 아니라 먼저 주신 분입니다 (고후 8:9).

"십일조는 율법이니 그리스도인에게는 상관없다. 그렇다면 나는 얼마를 내도 되는가?" 이 반론에는 옳은 점이 있습니다. 신약은 그리스도인에게 십분의 일을 명하지 않으며, 바울은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고후 8:13). 그러나 신약의 자유는 인색함이 아니라 넉넉함을 향한 자유입니다. 가난한 과부는 두 렙돈, 곧 "생활비 전부"를 드렸고, 예수께서는 액수가 아니라 그 마음을 귀히 보셨습니다 (눅 21:1-4). 많은 그리스도인은 십분의 일을 상한선이 아니라 출발점으로 삼고, 어떤 이들은 형편에 따라 다른 비율로 드립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것은 자원하는 마음입니다.

"교회가 헌금을 강요하고 재정을 불투명하게 쓴다." 한국 교회 안팎에서 자주 듣는 이 비판은 귀 기울여 들을 만합니다. 십일조 여부를 직분이나 교인의 자격과 묶거나, 복을 받으려면 내야 한다고 압박하거나, 낸 사람과 내지 못한 사람을 구별하는 일은 "억지로 하지 말지니"라는 말씀과 어긋납니다. 또 아나니아에게 베드로는 땅이 팔리기 전에도 후에도 그의 것이었다고 말했습니다 (행 5:4). 헌금은 자원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쓰임을 투명하게 밝히고 가난한 이웃을 돌보는 데 쓰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것은 헌금 자체를 반대하는 말이 아니라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 일입니다.

더 생각해 보기

성경의 줄기는 분명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고, 우리는 받은 자로서 기쁘게, 정기적으로, 형편에 맞게, 가난한 이를 기억하며 드립니다. 십분의 일이 그 길의 한 지표인지, 아니면 율법 아래의 옛 기준인지는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다르게 이해하지만, 구원이 십일조에 달려 있지 않다는 점과 드림이 사랑의 열매라는 점에서는 같은 말을 합니다. 야고보는 헐벗은 이에게 말만 하고 쓸 것을 주지 않는다면 무슨 유익이 있느냐고 묻습니다 (약 2:15-16).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나는 드릴 때 기쁨이 있습니까, 두려움이나 부담이 있습니까? 내가 드리는 것 가운데 가난한 이웃에게 가는 몫은 얼마입니까? 정해진 비율을 지키는 것과 마음을 드리는 것을 나는 어떻게 구별하고 있습니까?

더 읽으려면 돈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와 구약의 율법은 지금도 지켜야 하는가?를 보십시오.

성경과 고전 주석을 바탕으로, 역사적 기독교 신앙(사도신경, 니케아 신경)의 관점에서 쓴 글입니다. 그리스도인 사이에 견해가 갈리는 문제는 여러 견해를 함께 소개합니다. 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