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은 제사를 지내도 되는가?
성경은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하고, 우상 숭배와 귀신과의 교제를 금합니다. 두 명령 모두 분명하지만 제사가 그 둘 가운데 어디에 해당하는지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인의 판단이 나뉩니다. 한국 가톨릭은 고쳐진 예절을 효도와 공경의 표현으로 허락하고, 대부분의 개신교는 제사 대신 추도예배를 드립니다. 어느 쪽이든 가족에 대한 사랑과 양심, 그리고 제사를 지내는 이들에 대한 존중이 함께 가야 합니다.
성경의 답
이 질문 앞에서 많은 그리스도인은 마음이 둘로 갈립니다. 부모를 사랑하고 존경하고 싶은 마음이 하나이고, 하나님께만 드려야 할 것을 다른 곳에 드리고 싶지 않은 마음이 다른 하나입니다. 성경은 두 마음을 모두 인정합니다. 먼저 십계명입니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주 네 하나님이 네게 주는 땅에서 네 날들이 길리라.
출 20:12
바울은 이것을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그것은 약속 있는 첫째 명령이니)"이라 부릅니다 (엡 6:2). 예수께서도 이 계명을 중요하게 다루셨습니다. 어떤 이들이 재산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구실로 부모를 돌보지 않자, 그것이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공경하지 않아도 의무를 면제받으리라, 하여 너희 전통으로 이같이 하나님의 명령을 무효가 되게 하였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마 15:6). 곧 공경은 마음의 예의에 그치지 않고, 살아 계신 부모를 돌보는 일을 포함합니다. 바울도 가족을 돌보지 않는 것을 "그러나 누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집 사람들을 부양하지 아니하면 그는 믿음을 부인한 자요 불신자보다 나쁜 자니라."의 행동으로 말합니다 (딤전 5:8).
그러나 같은 십계명의 앞부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고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곧 주 네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니라. 나는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는 아버지들의 불법을 자손들에게 벌하여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출 20:5
신약에서 이 문제와 가장 가까운 본문은 고린도전서 8-10장입니다.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되느냐를 다루는 대목입니다. 바울은 우상이 "그러므로 우상들에게 희생물로 바친 그것들을 먹는 것에 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서 아무것도 아니며 한 분 외에는 다른 신이 없는 줄 아노라." 하나님은 한 분뿐이라고 말합니다 (고전 8:4). 그래서 시장에서 파는 고기는 "무엇이든지 고기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해 아무것도 묻지 말고 먹으라." 먹어도 됩니다 (고전 10:25). 그러나 우상의 제사 자리 자체에 대해서는 다르게 말합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건대 이방인들은 자기들이 희생물로 드리는 것들을 하나님께 희생물로 드리지 아니하고 마귀들에게 드리나니 나는 너희가 마귀들과 교제하는 것을 원치 아니하노라.
고전 10:20
그리고 누가 "이것이 제물이라" 알려 주면, "그러나 어떤 사람이 너희에게 이르되, 이것은 우상들에게 희생물로 바친 것이라, 하거든 그것을 알게 한 사람과 양심을 위해 먹지 말라. 땅과 거기의 충만한 것은 주의 것이니라."고 합니다 (고전 10:28). 이 가르침에서 얻을 수 있는 기준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그 행위가 무엇을 뜻하느냐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보는 사람과 나의 양심에 어떻게 작용하느냐입니다. 로마서 14장은 여기에 더합니다. 음식과 날에 대해 신자들의 확신이 서로 달랐을 때 바울은 "어떤 사람은 한 날을 다른 날보다 귀히 여기고 다른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 사람은 자기 마음에서 완전히 확신할지니라."고 합니다 (롬 14:5). 그리고 의심하며 행하는 것은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를 받나니 이는 그가 믿음을 따라 먹지 아니하기 때문이라. 무엇이든지 믿음에서 나지 아니하는 것은 죄니라."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롬 14:23).
성경에는 "제사를 지내라" 또는 "지내지 말라"는 직접적인 문장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사가 단순한 추모인지, 아니면 고린도전서 10장이 말하는 제사에 해당하는지를 판단하는 일은 성경의 원리를 오늘의 한국 사회에 적용하는 일이 됩니다.
교회의 증언
이 문제는 한국만의 것이 아닙니다. 17-18세기에 가톨릭 안에서는 중국의 조상 제례를 사회적 예절로 볼 수 있는지를 두고 오랜 논쟁이 있었고, 로마는 한때 이를 금했습니다. 한국에서는 1791년에 윤지충이 어머니의 상을 당해 유교식 제사를 지내지 않고 집안의 신주를 불살랐다는 이유로 외사촌 권상연과 함께 처형당했습니다. 조선 사회는 이것을 부모를 저버린 행위로 보았지만, 윤지충은 신앙의 양심 때문에 그렇게 했다고 전해집니다. 이 일은 제사가 이 땅 그리스도인에게 얼마나 무거운 문제였는지를 보여 줍니다.
1939년 교황청 포교성성은 비오 12세의 승인을 받아 훈령(Plane compertum est)을 내어, 공자와 죽은 이를 기리는 중국의 예식이 이제는 종교 행위가 아니라 시민적 예절의 성격을 가진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이 이 예식에 참석하고, 죽은 이나 그 초상, 이름만 적은 패 앞에서 절하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한국 교회는 1940년에 이 결정을 따랐고, 오늘날 한국 가톨릭은 고인의 사진이나 이름 앞에서 절하고 예를 표하는 일을 효도와 공경의 표현으로 인정합니다. 다만 죽은 이의 영혼이 와서 음식을 먹거나 복을 준다는 생각은 미신으로 보아 받아들이지 않으며, 신자들은 죽은 이를 위해 미사와 기도를 드립니다. 개신교의 대다수 교단은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절하고 음식을 차리는 제사 대신, 가족이 모여 찬송하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고인을 기억하는 추도예배를 드립니다. 한국 개신교 대부분은 추도예배에서 죽은 이를 위해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억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봅니다. 개신교 안에서도 제사의 절을 풍습으로 볼 여지가 있다고 보는 신학자들이 있고, 더 엄격한 입장을 지키는 교회도 있어 정도의 차이가 있습니다.
두 입장은 서로 다른 우려에서 나옵니다. 가톨릭의 입장은 효도와 공경을 지켜 가족과 이웃이 복음에서 멀어지지 않게 하려는 것이고, 개신교 다수의 입장은 절하고 음식을 차리는 모습이 하나님께만 드릴 예배로 오해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차이를 가볍게 말할 수 없습니다.
매튜 헨리는 출애굽기 20:12를 풀며 "네 부모를 공경하라"에 "우리의 행실로 나타나는 그들에 대한 존경"이 들어 있다고 합니다 매튜 헨리. 고린도전서 10장에 대해서는 "이방 제사의 일부로 음식을 먹는 것은, 그 제사를 받는 우상을 예배하는 것이며" 그것과 사귐을 갖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매튜 헨리. 그리고 로마서 14장에서는 이렇게 권합니다. "의심하는 양심을 거슬러 행하는 것을 조심하십시오" 매튜 헨리.
원어로 보기
십계명의 "공경하라"는 히브리어 카베드(כָּבֵד)입니다. 이 낱말의 바탕에는 '무겁다'는 뜻이 있어, 누군가에게 무게를 실어 주고 존중한다는 의미로 쓰입니다. 에베소서 6:2의 헬라어 티마오(τιμάω)는 '값을 매기다, 귀히 여기다'입니다. 어느 쪽이든 공경은 말뿐 아니라 부모에게 실제로 무게와 값을 두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고린도전서 8장의 "우상의 제물"은 헬라어 한 낱말 에이돌로튀톤(εἰδωλόθυτος)입니다. 우상에게 바쳐진 것이라는 뜻이며, 바울은 같은 음식이라도 그것이 놓인 자리와 의미에 따라 다르게 판단합니다. 10장 20절의 "귀신"은 다이모니온(δαιμόνιον)입니다. 또한 "양심"은 쉬네이데시스(συνείδησις)로, 자기 행위를 '함께 아는' 내면의 인식입니다. 바울이 이 문제에서 거듭 양심을 언급하는 것은 결론이 행위 자체뿐 아니라 그 행위가 무엇을 뜻하는가에도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흔한 반론과 답
"제사는 종교가 아니라 효도다. 부모를 기억하는 일을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불효가 아닌가?" 이 말은 무겁게 들어야 합니다. 많은 한국 가정에서 제사는 신을 섬기는 일이기보다 가족이 모여 부모를 기억하고 서로 얼굴을 보는 자리입니다. 가톨릭 교회가 이를 허락한 것도 그런 이해에 근거합니다. 개신교 쪽의 답은 이렇습니다. 공경의 마음은 같지만, 제사의 형식, 곧 신위에 절하고 음식을 차려 올리는 일은 오랫동안 죽은 이의 영혼이 와서 흠향한다는 믿음과 함께 있었고, 그 의미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우상 숭배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지금은 그런 믿음 없이 추모의 마음으로 지내는 가정도 많아, 같은 행동도 가족에 따라 뜻이 다릅니다. 그래서 성경이 뜻을 중요하게 보듯, 가정마다 그 뜻을 살펴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어느 쪽 그리스도인도 부모 공경을 가볍게 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추도예배는 이름만 바꾼 제사가 아닌가? 반대로 가톨릭의 방식은 타협이 아닌가?" 서로를 향한 이 의심은 실제로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형식만 따져서는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추도예배의 중심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고인에 대한 기억이고, 가톨릭의 절의 중심은 공경의 표시입니다. 둘 다 죽은 이에게 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다만 두 교회는 공경을 표현하는 몸짓을 다르게 판단합니다. 한쪽은 몸짓의 의미가 바뀌었다고 보고, 다른 쪽은 몸짓이 여전히 오해를 부른다고 봅니다. 로마서 14장은 이런 문제에서 서로를 업신여기거나 정죄하지 말라고 합니다 (롬 14:3).
"믿지 않는 가족이 제사를 지낼 때 안 가면 가족이 깨지는데, 그 값을 치러야 하는가?" 이 어려움은 진지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성경은 가족을 소홀히 하지 말라고도 하고, 양심을 거슬러 행하지 말라고도 합니다. 일률적으로 정할 수 없지만 몇 가지 원칙은 있습니다. 먼저 믿음에서 우러나오지 않는 행동은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고린도전서 10:32-33이 말하듯, 가능하면 "거치는 자가 되지" 않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합니다. 가톨릭 신자라면 교회의 지침에 따라 가족과 함께 예를 표할 수 있습니다. 개신교 신자들은 흔히 제사에 참석하는 것과 제사를 드리는 것을 구별합니다. 어떤 개신교 신자는 가족 모임에 함께하며 일을 돕고 음식을 나누되 절하는 일에서만 조용히 물러서고, 마음 상한 가족을 위로합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정죄의 말이 아니라 사랑의 행동입니다. 평소에 부모를 정성껏 찾아뵙고 돌보는 것이 가장 분명한 공경의 증언입니다.
더 생각해 보기
이 문제는 정답을 알아도 실천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가족 모임의 중심에 서 있는 맏이에게는 더 그렇습니다. 그래서 몇 가지를 권합니다. 처음부터 가족과 이야기하십시오. 어떤 일이 닥치기 전에, 부모와 형제를 존경하고 사랑한다는 것과 내가 믿음 때문에 어떤 부분에서 조심한다는 것을 부드럽게 설명하십시오. 제사를 지내는 가족을 우상 숭배자라고 단정하지 마십시오. 그들 대부분은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자리에 있습니다. 또 다른 입장의 그리스도인을 판단하지 마십시오. 같은 성경을 읽고 같은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다르게 결론 내린 형제입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내가 살아 계신 부모에게 하는 공경은 제사의 형식에 관한 논쟁만큼 진지합니까? 내가 지키려는 양심은 가족에게 사랑으로 전해지고 있습니까? 제사가 나에게 불편한 것은 신앙 때문입니까, 낯섦 때문입니까?
죽음과 슬픔에 관해서는 죽음 뒤에는 무엇이 있는가?와 슬픔을 어떻게 견딜 수 있는가?를, 두 전통의 차이는 가톨릭과 개신교는 무엇이 다른가?를 보십시오.
관련 질문
- 기독교는 서양 종교인가?기독교는 서양에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아시아의 유대 땅에서 나셨고, 복음은 처음 몇 세기 동안 아시아와 아프리카로도 널리 퍼졌으며, 오늘 그리스도인의 대다수는 아프리카와 아시아와 라틴 아메리카에 삽니다. 서양 선교와 제국이 얽힌 아픈 역사는 사실이지만, 복음은 어느 한 문화의 소유가 아니라 모든 민족을 향한 것입니다.
- 가톨릭과 개신교는 무엇이 다른가?가톨릭(천주교)과 개신교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신성, 십자가와 부활을 함께 고백하는 한 그리스도교입니다. 둘의 차이는 권위의 중심(성경과 전통, 교황), 구원의 설명(칭의), 성례의 수와 이해, 마리아와 성도에 대한 신앙, 교회의 구조에서 나타납니다. 이 글은 각 교회의 가르침을 가능한 한 그 교회의 말로 소개합니다.
- 슬픔을 어떻게 견딜 수 있는가?슬픔은 믿음이 없다는 표시가 아니라 사랑의 다른 얼굴입니다. 예수께서도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우셨고, 성경은 소망 없는 사람처럼 슬퍼하지 말라고 할 뿐 슬퍼하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다. 슬픔에는 시간이 걸리며, 하나님은 마음이 상한 사람 가까이 계시고, 교회는 우는 사람과 함께 웁니다.
- 죽음 뒤에는 무엇이 있는가?성경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사람이 주와 함께 있고, 마지막 날에 몸이 다시 살아나며, 그 뒤에 심판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 소망의 근거는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죽음과 부활 사이의 상태를 어떻게 설명할지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서로 다르지만,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점은 한결같이 고백해 왔습니다.
관련 주제
성경과 고전 주석을 바탕으로, 역사적 기독교 신앙(사도신경, 니케아 신경)의 관점에서 쓴 글입니다. 그리스도인 사이에 견해가 갈리는 문제는 여러 견해를 함께 소개합니다. 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