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행복이란 무엇인가?

짧은 답

성경은 행복을 기분 좋은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과 바른 관계 안에서 누리는 복됨과 기쁨으로 말합니다. 이 기쁨은 형편이 좋을 때만이 아니라 어려움 속에서도 이어질 수 있다고 약속됩니다. 그리고 행복은 직접 붙잡으려 할 때보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에서 따라오는 선물로 그려집니다.

성경의 답

성경은 행복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시편은 첫 구절부터 행복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말합니다.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계획대로 걷지 아니하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조롱하는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시 1:1

이 사람의 복은 그가 무엇을 가졌는가에 있지 않고 누구와 함께 걷는가에 있습니다. 시편은 이어서 그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밤낮으로 묵상하며,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다고 말합니다 (시 1:2-3). 뿌리가 물가에 닿아 있으니 가뭄에도 잎이 마르지 않는다는 그림입니다.

예수께서도 산 위에서 같은 말로 가르침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은 세상의 상식과 반대로 보입니다.

영이 가난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하늘의 왕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요,

마 5:3

애통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요,

마 5:4

가난한 사람, 우는 사람이 복되다는 말씀은 가난과 슬픔이 그 자체로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기 힘으로 설 수 없음을 아는 사람, 세상의 아픔 앞에서 마음이 무너지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열려 있다는 뜻입니다. 행복은 모든 것이 잘 풀리는 데서 오지 않고,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다는 사실에서 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복 있는 사람의 목록 끝에 "마음이 순수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기 때문이요"라고 하십니다 (마 5:8).

기쁨에 대해서도 예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 기쁨은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 안에 머무는 데서 나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일들을 말한 것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어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요 15:11

예수께서는 이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다고도 하십니다 (요 16:22). 바울은 이것을 몸으로 보여 줍니다. 그는 갇힌 몸으로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항상 주를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권합니다 (빌 4:4). 그러고는 비결을 털어놓습니다. 그것은 천성이 아니라 배운 것이었습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거기에 만족하는 것을 내가 배웠노니

빌 4:11

그렇다고 성경이 슬픔을 억지로 웃음으로 덮으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시편의 상당 부분은 탄식입니다. 하박국은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고 외양간에 소가 없는 날에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손실을 못 본 척하는 말이 아니라 손실을 다 바라본 뒤의 고백입니다 (합 3:17-18).

이 모든 가르침과 맞닿아 있는 구약의 책이 전도서입니다. 전도자는 행복을 찾아 모든 것을 시험해 본 사람처럼 말합니다. 즐거움, 일, 부, 지혜를 마음껏 누리고 나서 이렇게 결론짓습니다.

그때에 내가 내 손이 이룩한 모든 일과 내가 수고하여 행한 모든 수고의 열매를 바라보았는데, 보라, 모든 것이 헛되며 영을 괴롭게 하는 것이요, 해 아래에는 아무 유익이 없었도다.

전 2:11

전도서는 이 세상의 좋은 것들이 나쁘다고 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것들이 하나님 없이 행복을 채워 주지는 못한다고 말합니다. 책의 마지막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전체 일의 결론을 들을지니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온전한 의무이니라." (전 12:13). 마지막으로, 행복을 목표로 삼지 말라는 가르침도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오직 너희는 첫째로 하나님의 왕국과 그분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마 6:33). 가장 큰 계명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라면 (마 22:37-39), 행복은 그 사랑에서 따라오는 열매입니다.

교회의 증언

교회는 행복을 구하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고 가르쳐 왔습니다. 문제는 행복을 어디에서 찾느냐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을 시작하며, 하나님이 우리를 자신을 향하도록 지으셨기에 우리 마음은 그분 안에서 쉬기까지 평안을 얻지 못한다고 고백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1.1. 전도서가 보여 준 공허함은 바로 이 불안의 진단이라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도 사람의 가장 높은 목적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으로 묶어서 말합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문.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과 사람이 즐거워하는 일은 서로 다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의 주석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기쁨이 무엇인지를 이렇게 풀이합니다.

충만하리라고 하신 우리의 기쁨은 무엇입니까? 그분과 사귐을 갖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그는 이 기쁨이 부활한 사람들이 받을 상 안에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덧붙입니다. 그러니 지금의 기쁨은 완성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크리소스토무스는 같은 구절에서, 수난이 다가와 제자들의 기쁨을 가로막으려 하자 그리스도께서 이 말씀을 덧붙이셨다고 봅니다. 슬픔이 닥치더라도 그것을 없애겠다는 약속이라는 것입니다 크리소스토무스.

복 있는 사람에 대해 위(僞)크리소스토무스는 이렇게 씁니다. "그분의 선물은 성도들의 소원보다 큽니다" 위(僞)크리소스토무스. 우리가 바라는 것보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더 크다는 말입니다. 매튜 헨리는 빌립보서 4장을 풀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기쁨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매우 중요하며, 그리스도인들은 거듭거듭 이 기쁨으로 부름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매튜 헨리. 기쁨은 저절로 유지되지 않으므로 거듭 권면받아야 한다는 정직한 말입니다.

원어로 보기

시편 1:1의 "복"은 히브리어 에셰르(אֶשֶׁר)입니다. 이 말은 "아, 그 사람의 행복이여!"라는 탄성에 가깝게 쓰이는 때가 많습니다. 복을 비는 말이 아니라 이미 누리고 있는 사람을 보고 감탄하는 말이라는 점이 눈에 띕니다. 그 복은 율법을 즐거워하며 하나님과 함께 걷는 삶에 붙어 있습니다.

산상수훈의 "복이 있나니"는 그리스어 마카리오스(μακάριος)입니다. 많은 학자에 따르면 초기 그리스 시에서 이 말의 옛 형태인 마카르(μάκαρ)는 주로 걱정과 수고를 모르는 신들의 복된 상태를 가리켰습니다. 예수께서는 이 말을 가난한 사람과 우는 사람에게 쓰셨습니다. 누구에게나 뜻밖이었을 쓰임입니다.

기쁨은 카라(χαρά)입니다. 이 말은 은혜를 뜻하는 카리스(χάρις)와 같은 뿌리(기뻐하다)에서 나왔습니다. 낱말의 뿌리가 뜻을 정하지는 않지만, 이 연결은 기쁨이 내가 만들어 내는 감정이기 전에 받은 은혜에 대한 반응일 수 있음을 떠올리게 합니다. 요한복음 15:11의 "내 기쁨"도 그리스도께서 먼저 가지신 기쁨이 우리 안에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흔한 반론과 답

"행복을 구하는 것은 이기적이다. 선한 삶은 행복과 상관없이 의무를 따르는 것이어야 하지 않은가?" 이 반론에는 진지한 도덕적 직관이 담겨 있습니다. 보상을 바라고만 하는 선행은 어딘가 순수하지 않아 보입니다. 성경도 그 점을 알고 있어서 가장 큰 계명을 보상이 아니라 사랑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행복에 대한 갈망을 억누르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시편 기자는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라고 고백하며 하나님 자신을 "내 육체와 내 마음이 쇠약하오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힘이시요, 영원토록 내 몫이니이다."이라 부릅니다 (시 73:25-26). 하나님이 목적이고 하나님이 곧 복이라면, 하나님을 갈망하는 것은 이기심이 아닙니다. 순서가 중요합니다. 행복이 하나님 위에 놓이면 우상이 되고, 하나님 안에서 발견되면 선물이 됩니다.

"경건한 사람이 고통받고 악인이 잘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을 믿는 것이 행복을 보장한다는 말은 거짓이 아닌가?" 이것은 성경 안에서도 나오는 반론입니다. 시편 73편의 기자는 악인의 형통을 보고 거의 넘어질 뻔했다고 고백합니다. 성경은 신앙이 형편의 좋음을 보장한다고 약속하지 않습니다. 욥기와 전도서가 바로 그 약속에 대한 반박을 담고 있습니다. 성경이 약속하는 것은 어떤 형편에서도 끊어지지 않는 하나님과의 사귐입니다. 바울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고 말하면서, 그 근거를 환난 자체가 아니라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님에 의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넓게 부어졌기 때문이니"에 둡니다 (롬 5:3-5). 물론 이 대답이 모든 아픔을 설명해 주지는 않습니다. 이 문제는 고난에도 의미가 있는가?에서 더 이야기합니다.

"기쁨을 말하는 것은 우울하고 힘든 사람에게 상처가 된다." 이 반론은 옳은 지적을 담고 있습니다. 마음의 병을 앓는 사람에게 "기뻐하라"고 명령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더 큰 죄책감을 줄 수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기쁨은 슬픔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예수께서도 우셨고, 시편의 기도는 탄식으로 가득합니다. 기쁨은 슬픔 옆에 함께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울증은 믿음이 모자라서 생기는 병이 아닙니다. 이 점은 우울증은 믿음이 부족해서인가?에서 다룹니다. 도움이 필요하다면 의사나 상담자, 가까운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입니다.

더 생각해 보기

행복을 찾는 일은 사람마다 다르게 시작되지만, 성경은 그 길의 끝에 한 사람이 서 계신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흔히 "이것만 있으면 행복할 텐데"라고 생각합니다. 전도자는 그것을 다 가져 본 사람의 목소리로, 그래도 마음이 차지 않는다고 일러 줍니다. 그러나 이 말은 우리를 절망시키려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우리를 완전히 채우지 못한다는 사실이 우리를 채울 수 있는 분께로 이끄는 안내판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사귐은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습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얻으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까? 내가 가진 기쁨 가운데 환경이 바뀌면 사라질 것은 무엇이고, 사라지지 않을 것은 무엇입니까? 빌립보서의 바울처럼 "자족하기를 배우는" 일이 나에게는 무엇을 뜻합니까?

더 읽으려면 사랑이란 무엇인가?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십시오. 시편 1편과 마태복음 5장 1-12절을 천천히 읽는 것도 좋은 출발입니다.

출처

  1.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읽기
  2. 웨스트민스터 총회,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647 —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요리문답(107문). 제1문: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인가. 하나님과 창조, 구원, 십계명, 성례와 기도를 가르친다. 읽기

성경과 고전 주석을 바탕으로, 역사적 기독교 신앙(사도신경, 니케아 신경)의 관점에서 쓴 글입니다. 그리스도인 사이에 견해가 갈리는 문제는 여러 견해를 함께 소개합니다. 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