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재해는 왜 일어나는가?
성경은 지진과 폭풍으로 죽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보다 죄가 더 많아서 그렇게 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피조 세계 전체가 아직 온전히 회복되지 않은 채 탄식하고 있으며, 하나님은 그 속에서 고난받는 사람들 곁에 계시고 새 창조를 약속하신다고 말합니다. 재난의 이유를 모두 아는 척하지 않는 것이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정직한 시작입니다.
성경의 답
지진과 해일이 마을을 쓸어 가고 나면 사람들은 두 가지를 묻습니다. 왜 하필 이곳에서, 그리고 하나님은 어디 계셨는가. 지금 이 글을 읽는 분이 재난으로 가족과 집을 잃었다면, 이 질문은 이론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 질문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이유를 모두 아는 척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먼저 성경이 하지 않는 말부터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계시던 때에 두 가지 소문이 돌았습니다. 하나는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제사 드리는 자리에서 죽였다는 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실로암의 망대가 무너져 열여덟 사람이 깔려 죽었다는 소식입니다. 앞의 것은 사람이 저지른 악이고 뒤의 것은 사고였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더 큰 죄인이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싶어 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생각을 정면으로 물리치셨습니다.
또 너희는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깔려 죽은 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들보다 더 큰 죄인이었다고 생각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그러나 너희가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그와 같이 멸망하리라, 하시니라.
눅 13:4-5
재난으로 죽은 사람들이 남보다 더 나쁜 사람들이었다는 생각은 틀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살아남은 사람에게는, 삶이 이처럼 약하니 하나님께 돌아서는 일을 미루지 말라고 하십니다. 회개의 요청은 살아 있는 우리에게 하는 말씀이지 죽은 이들에 대한 진단이 아닙니다. 예수께서는 또 하나님이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고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5:45). 자연은 사람의 선악을 따라 골라서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자연의 파괴를 어떻게 설명할까요. 바울은 사람만이 아니라 피조 세계 전체가 지금 정상이 아닌 상태에 있다고 말합니다.
창조물이 헛된 것에 복종하게 된 것은 자진해서 된 것이 아니요, 소망 중에 바로 그것을 복종하게 하신 분으로 인한 것이니 이는 창조물 자신도 썩음의 속박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스러운 자유에 이를 것이기 때문이라. 또 온 창조 세계가 지금까지 함께 신음하며 고통 중에 산고를 치르는 줄을 우리가 아나니
롬 8:20-22
창세기는 사람이 하나님을 떠난 일이 땅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전합니다 (창 3:17-19). 다만 이 구절을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에는 그리스도인 사이에 차이가 있습니다. 많은 이들은 땅에 내린 저주를 로마서 8장과 함께 읽고, 타락 이전에는 죽음도 파괴적인 격변도 없었으며 지금은 피조 세계 전체가 타락의 영향 아래 있다고 봅니다. 다른 이들은 지구의 오랜 역사를 받아들이며, 판이 움직이고 생명이 순환하는 질서는 처음부터 ‘심히 좋은’ 세계의 일부였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봅니다. 창세기 1장을 읽는 방법은 창세기는 역사인가?에서 다룹니다. 두 입장 모두 로마서 8장의 중심에는 동의합니다. 이 세상은 지금 있는 그대로가 하나님이 마지막에 주시려는 세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편 성경은 하나님이 자연의 거친 힘 위에 계신 분이라고도 말합니다. 욥기에서 하나님은 바다를 두고 이렇게 물으십니다. 바닷물이 태에서 나옴 같이 넘쳐 흐를 때에 문으로 그것을 막은 자가 누구냐 하시고, 네가 여기까지 오고 넘어가지 못하리니 네 교만한 물결이 여기 그칠지니라 하셨다는 것입니다 (욥 38:8-11). 이것은 재난의 이유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인간이 다 헤아릴 수 없는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의 선언입니다. 시편 46편은 땅이 변하고 산이 흔들려도 하나님이 피난처이시라고 노래합니다 (시 46:1-3).
그리고 복음서는 광풍 속의 제자들을 보여 줍니다. 배가 물에 차자 제자들은 주무시는 예수를 깨우며 소리칩니다.
그분께서는 배 뒤쪽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라. 그들이 그분을 깨우며 그분께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는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매 그분께서 일어나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에게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신즉 바람이 그치고 매우 고요하게 되거늘
막 4:38-39
제자들의 이 항의는 다듬어지지 않은 채 그대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폭풍을 잠잠하게 하신 일은 자연의 힘도 그분 앞에서는 한계가 있음을 보여 줍니다. 동시에 그분이 다 막아 주시지 않는 일이 아직 세상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 이 질문을 어렵게 만들기도 합니다. 성경은 그 긴장을 풀어 주지 않고, 마지막 약속으로 이어 갑니다.
또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시리라. 다시는 사망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없으며 또 아픔도 다시는 없으리니 이는 이전 것들이 지나갔기 때문이라, 하더라.
계 21:4
교회의 증언
교회는 재난 앞에서 이유를 설명하려는 사람과 곁에 있으려는 사람 사이에서 오래 서 있었습니다. 1755년 11월 1일 만성절 아침, 포르투갈의 리스본에 큰 지진이 일어나 해일과 화재가 뒤따랐고 도시 대부분이 무너져 수만 명이 죽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교회에 모여 있던 시간이었습니다. 일부 설교자는 이것을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선포했고, 유럽의 지식인들은 이 사건 앞에서 ‘모든 것은 최선’이라는 낙관적인 신정론을 다시 따져 물었습니다. 볼테르는 이 재난에 대한 시를 써서 그런 낙관론을 비판했고, 루소는 이에 답하면서 자연이 사람들을 높은 집에 모여 살게 한 것은 아니라고, 피해의 많은 부분은 사람의 선택에서 온다고 지적했습니다. 이 논쟁 뒤로 많은 사람이 재난을 특정한 사람들에 대한 징벌로 읽는 일에 신중해졌지만, 모든 신앙인이 같은 결론에 이른 것은 아닙니다.
매튜 헨리는 로마서 8장을 풀면서 이렇게 씁니다. "인류가 스스로의 악함과 서로의 악함으로 겪는 비참함은, 세상이 언제까지나 지금 같지는 않을 것을 선언합니다" 매튜 헨리. 누가복음 13장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큰 고난을 당한 사람들을 큰 죄인으로 여길 것이라 하여 탓하지 말라고" 그리스도께서 듣는 이들에게 경고하셨다는 것입니다 매튜 헨리.
니케아 신경은 하나님을 하늘과 땅의 창조주로 고백하고, 죽은 자의 부활과 오는 세상의 생명을 기다린다고 고백합니다 니케아 신경. 창조를 믿는 일과 새 창조를 기다리는 일이 한 고백 안에 있습니다.
원어로 보기
로마서 8:22의 "피조물"은 크티시스(κτίσις)이고, 사람을 포함한 창조된 모든 것을 가리킬 수 있는 말입니다. 바울은 이 피조 세계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한다"고 하는데, 헬라어 원문의 동사는 쉬스테나조(συστενάζω)와 쉰오디노(συνωδίνω)입니다. 앞의 것은 "함께 탄식하다", 뒤의 것은 "함께 해산의 고통을 겪다"는 뜻입니다.
해산의 고통이라는 비유가 중요합니다. 진통은 고통이지만 끝없는 고통이 아니라 새 생명을 향해 가는 고통입니다. 바울은 지금의 재난과 파괴를 가볍게 보지 않고 탄식이라 부릅니다. 그러나 그 탄식에는 방향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어서 "내가 생각하건대 이 현 시대의 고난들은 앞으로 우리 안에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될 수 없도다."라고 쓰는데 (롬 8:18), 이 말은 고난이 작다는 뜻이 아니라 오게 될 것이 훨씬 크다는 뜻입니다. 또 "굴복케 하시는 이"가 누구인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많은 해석자는 하나님이라고 보고, 일부는 아담이나 사단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흔한 반론과 답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 사람이 죽는 지진이 없는 세상을 만드실 수 있지 않았는가? 설계자가 책임져야 한다." 이 반론은 가볍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의 창조자라면 자연의 법칙에도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반론을 모두 해소하는 대답은 없습니다. 몇 가지는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 판의 움직임처럼 지진을 일으키는 과정은 산과 대륙과 비옥한 땅을 형성하는 과정과 얽혀 있다고 지구과학자들은 설명합니다. 일정한 법칙이 있는 세계가 생명이 살 수 있고 사람이 선택하고 배울 수 있는 세계의 조건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렇다고 해서 피해의 규모가 정당화되지는 않는다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규칙성이 왜 이만큼의 파괴를 포함해야 했는지는 알 수 없고, 성경도 설명하지 않습니다. 셋째, 성경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최종적인 세상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성경에도 홍수와 소돔과 재앙이 징벌로 나온다. 그렇다면 재난은 죄에 대한 벌이 아닌가?" 성경에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제시되는 재난이 실제로 있습니다. 노아의 홍수와 소돔, 이집트의 재앙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하나님이 친히 심판이라고 밝히셨고 대개 미리 경고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사건이 일어난 뒤에 피해자들을 가리켜 이들이 죄가 더 많다고 읽는 일을 금하셨습니다. 이 차이가 중요합니다. 재난을 사후에 해석하는 일은 욥의 친구들이 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그 친구들을 책망하셨습니다 (욥 42:7). 어떤 재난이 피해자들에 대한 심판인지는 사람이 알 수 없고, 고통당하는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 문제는 병은 죄의 벌인가?에서도 이어집니다.
"그렇다면 재난 속에서 하나님은 어디 계셨는가? 기도해도 막아 주지 않으셨다." 이 물음에 대한 성경의 대답은 이유보다 임재입니다. 시편은 여호와께서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신다고 말합니다 (시 34:18). 많은 그리스도인은 재난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구조하는 사람, 먹을 것을 나누는 사람, 곁에서 우는 사람의 손을 통해 경험했다고 증언합니다. 이것이 질문을 끝내지는 못합니다. 다만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재난을 당한 사람 위에 서서 내려다보는 분이 아니라, 폭풍 속의 배에 함께 타신 분입니다. 이 믿음은 슬픔을 서둘러 덮지 않고 탄식하는 기도와 함께 갑니다.
더 생각해 보기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정직한 대답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재난으로 죽은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죄가 더 많은 것이 아닙니다. 피조 세계는 아직 온전히 회복되지 않은 채 탄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속에서 고난받는 사람 곁에 계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약속하셨습니다 (벧후 3:13). 이 대답이 폐허를 다시 세워 주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피해자에게 책임을 묻지 않고, 설명보다 위로와 도움이 먼저 와야 한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재난 소식을 들을 때 나는 이유를 따지기 전에 기도하고 도울 길을 찾습니까? 고통당하는 사람 앞에서 내가 하려는 말은 위로입니까, 판단입니까? 아직 보지 못하는 새 창조를 소망하며 오늘 이웃의 필요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롬 8:24-25)?
더 읽으려면 선하신 하나님이 왜 악을 허락하시는가?와 하나님은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가?를 보십시오. 욥기 38-42장과 시편 46편을 천천히 읽어 보는 것도 좋습니다.
관련 질문
- 선하신 하나님이 왜 악을 허락하시는가?성경은 이 질문을 피하지 않지만 모든 것을 설명하는 이론도 주지 않습니다. 세상은 선하게 창조되었으나 죄로 망가졌고, 하나님은 악 가운데서도 선을 이루시며, 욥에게는 설명 대신 당신 자신을 보이셨고, 십자가에서는 고난 속으로 직접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악이 끝나는 날을 약속하십니다.
- 하나님은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가?성경은 하나님이 참새 한 마리와 우리의 모든 걸음까지 돌보시며 만물을 당신의 뜻대로 이끄신다고 말합니다. 동시에 사람의 선택과 책임도 진지하게 다룹니다. 교회는 이 둘을 어떻게 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서로 다른 강조를 두어 왔지만, 선하신 하나님의 손에 우리가 있다는 위로에는 한마음입니다.
- 병은 죄의 벌인가?성경은 병든 사람을 죄인으로 판단하는 일을 분명히 막습니다. 예수께서는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이 누구의 죄 때문이냐는 물음을 물리치셨고, 욥의 친구들은 하나님께 책망을 받았습니다. 어떤 병이 죄와 이어진 경우가 있다고 성경이 말하는 곳도 있지만, 그것을 규칙으로 삼거나 다른 사람의 병에 대입하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병든 사람을 고치시고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 고난에도 의미가 있는가?성경은 모든 고난에 이유를 붙이지 않으며, 고난이 언제나 벌이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탄식을 믿음의 말로 받아 주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그리스도가 고난 속에 함께하시며, 고난받은 사람이 같은 처지의 사람을 위로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의미는 설명이 아니라 함께하심과 소망 안에서 주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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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니케아·콘스탄티노플 공의회, 니케아 신경 325/381 — 동서방 교회가 함께 고백하는 신조. 읽기
성경과 고전 주석을 바탕으로, 역사적 기독교 신앙(사도신경, 니케아 신경)의 관점에서 쓴 글입니다. 그리스도인 사이에 견해가 갈리는 문제는 여러 견해를 함께 소개합니다. 성경 인용: 개역한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