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신앙은 충돌하는가?
성경은 세계를 질서 있게 지으신 하나님을 말하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자연을 탐구하는 일이 그 지혜를 살피는 일이라고 보아 왔습니다. 과학은 세계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묻고, 성경은 거기에 더해 누가 왜 지으셨는지를 묻습니다. 창세기 1장을 어떻게 읽을지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인 사이에 서로 다른 견해가 있지만, 모두 하나님이 창조주이시라는 데에는 하나입니다.
성경의 답
성경은 세계가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라 지음 받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첫 구절은 짧습니다.
처음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니라.
창 1:1
그리고 창조의 마지막 장면에서 하나님은 지으신 것을 돌아보십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만든 모든 것을 보시니, 보라, 매우 좋았더라. 그 저녁과 아침이 여섯째 날이더라." (창 1:31). 세계가 선하고 질서 있다는 이 확신은 과학이 자라는 토양이 되었다고 많은 역사가가 말합니다. 세계가 신의 변덕이나 환상이 아니라 지혜로 지어졌다면, 그 법칙을 찾아볼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오 주여, 주께서 행하신 일들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그것들을 다 만드셨사오니 주의 부요하심이 땅에 가득하나이다.
시 104:24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정하신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만일 내 언약이 낮과 밤과 함께하지 아니하며 내가 하늘과 땅의 규례들을 정하지 아니하였다면"를 말하고 (렘 33:25), 욥기에서 하나님은 "네가 하늘의 규례들을 아느냐? 네가 하늘의 통치권을 땅에 세울 수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욥 38:33). 자연에는 규칙이 있고, 그 규칙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라는 생각이 성경에 깔려 있습니다. 잠언은 탐구하는 일을 격려하는 듯한 말을 합니다.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나 문제를 찾아내는 것은 왕들의 영예니라.
잠 25:2
시편 111편도 "주께서 행하시는 일들이 위대하므로 그것들을 기뻐하는 모든 자가 그것들을 탐구하는도다."라고 합니다 (시 111:2). 이런 이유로 케플러, 보일, 패러데이 같은 근대 과학의 많은 선구자들은 자신의 일을 하나님의 작품을 연구하는 신앙의 일로 여겼습니다. 물론 모든 과학자가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신앙과 과학이 처음부터 적이었다고 하는 이야기는 역사를 너무 단순하게 만듭니다.
성경은 과학이 다루지 않는 질문도 다룹니다. 별을 보며 시편 기자는 이렇게 묻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 속에 깊이 두시나이까? 사람의 아들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찾아오시나이까?" (시 8:4). 과학은 별이 어떻게 생기고 움직이는지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왜 있는지, 무엇이 선한지, 이 세계가 어디를 향하는지는 실험실의 방법으로는 풀리지 않는 질문입니다. 성경은 하늘이 "하늘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밝히 드러내고 궁창이 그분의 손으로 행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한다고 말하며 (시 19:1), 사람은 "이처럼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하나님의 형상으로 그를 창조하시고 그들을 남성과 여성으로 창조하시니라."으로 지음 받았다고 말합니다 (창 1:27). 이것은 우주가 어떻게 작동하는가에 대한 설명이라기보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가에 대한 증언입니다.
교회의 증언
니케아 신경은 하나님을 하늘과 땅,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지으신 분으로 고백합니다 니케아 신경. 교회가 고백해 온 것은 하나님이 모든 것의 근원이라는 사실이지, 창조가 어떤 방법으로 이루어졌는가에 대한 한 가지 설명이 아닙니다.
매튜 헨리는 시편 104편을 풀면서 자연을 가까이 들여다보는 일을 이렇게 칭찬합니다. "사람이 만든 작품은 가까이 볼수록 거칠게 보이나, 자연의 작품은 더욱 정교하고 정확하게 보입니다" 매튜 헨리. 현미경과 망원경이 발달한 오늘에 읽어도 어색하지 않은 말입니다. 그는 시편 19편에서도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그분의 지혜와 능력과 선하심을 알리므로" 경건하지 않은 사람도 핑계할 수 없다고 합니다 매튜 헨리. 그리고 히브리서 11:3을 풀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보는 창조의 모든 작품은 하나님의 명령으로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매튜 헨리.
초대 교회의 신학자들 가운데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인이 자연에 대해 아는 척하며 허튼소리를 하면 신앙 자체가 비웃음을 산다고 경고했습니다. 그는 창세기를 문자 그대로만 읽을 수 없는 대목이 있다고 보았고, 성경을 풀이할 때 겸손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신앙인이 과학을 대하는 태도를 말해 주는 오래된 증언입니다.
원어로 보기
창세기 1:1의 "창조하다"는 히브리어 바라(בָּרָא)입니다. 이 동사의 기본형은 구약에서 언제나 하나님만을 주어로 합니다. 사람이 무언가를 만든다는 뜻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하시는 창조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1은 과학이 다루는 과정 너머의 질문, 곧 도대체 왜 무엇인가가 있는가를 향합니다.
잠언 25:2에서 "살피는 것"으로 옮긴 말은 하카르(חָקַר)입니다. "깊이 찾아 들어가다, 탐사하다"라는 뜻입니다. 성경은 탐구를 의심하지 않고 왕의 영화라고 부릅니다.
신약에서 믿음은 피스티스(πίστις)입니다. 근본적으로 신뢰, 곧 믿을 만한 분께 자기를 맡기는 것을 뜻합니다. 증거 없이 무엇이든 받아들이는 일이 아니라, 신뢰할 근거가 있는 분을 신뢰하는 일입니다. 이것은 아래의 반론을 다룰 때 중요합니다.
흔한 반론과 답
"신앙이란 증거 없이 믿는 것이다." 이 반론은 가볍지 않습니다. 현실에서 "믿음"이라는 말이 때로 증거와 상관없는 고집을 뜻하는 것도 사실이고, 그렇게 쓰는 신자들도 있습니다. 성경의 믿음은 그렇지 않다고 그리스도인들은 답합니다. 누가는 자기가 "모든 일을 맨 처음부터 완전히 이해한 나도 데오빌로 각하 당신에게 차례대로 써서 알리는 것을 좋게 생각하였으니" 뒤에 복음서를 쓴다고 밝힙니다 (눅 1:3). 요한은 자기가 쓴 표적들을 "이것들을 기록함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믿고 그분의 이름을 통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기록한다고 합니다 (요 20:31). 베뢰아 사람들은 바울의 말을 듣고도 "이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던 자들보다 더 고귀하여 온전히 준비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고 그것들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 기록들을 탐구하므로"하여 칭찬을 받았습니다 (행 17:11). 바울은 "모든 것을 시험해 보고 선한 것을 굳게 붙들라." 보라고 권합니다 (살전 5:21). 믿음은 증거를 따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증거가 가리키는 분께 자기를 맡기는 것입니다. 다만 인정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일은 수학 증명처럼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이 아니고, 믿음에는 증거 이상의 신뢰가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을 믿는 일과 비슷합니다. 친구나 배우자를 믿는 것은 증거를 따져서만이 아니라 그를 알아 가며 맡기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신뢰는 틀릴 수도 있는 것이므로, 정직한 믿음은 질문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창세기 1장은 과학과 맞지 않는다." 이것은 오늘날 가장 흔하고 현실적인 고민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문제에서 의견이 갈립니다. 어느 쪽이 맞는지는 여기서 정하지 않고, 각 견해가 내세우는 가장 좋은 이유를 소개합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창세기 1장이 역사의 기록으로서 말하며 하루는 문자 그대로의 하루, 세계는 비교적 최근에 지어졌다고 읽습니다. 이들은 본문의 평이한 의미를 존중하고, 출애굽기 20:11이 안식일의 근거로 "엿새 동안에" 만드셨다고 하는 점을 들며, 성경 해석이 당대의 과학 이론에 맞추어 흔들려서는 안 된다고 염려합니다.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날"을 긴 기간으로 보고, 하나님이 창조의 단계마다 일하셨다고 읽습니다. 이들은 히브리어 ‘욤’(날)이 더 긴 때를 가리키기도 한다는 점, 일곱째 날에는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라는 마무리가 없다는 점을 들고, 창조 세계가 남긴 기록도 바르게 읽으면 성경과 어긋날 수 없다고 봅니다. 또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창세기 1장이 연대기가 아니라 구조를 갖춘 문학적 글이며, 엿새와 안식일의 틀이 하나님이 세계를 성전처럼 질서 있게 채우시고 거기서 안식하신다는 신학을 전한다고 봅니다. 이들은 고대 근동의 글에서 이런 형식이 흔하다는 점과, 해와 달이 나흘째에야 만들어진다는 점이 글자 그대로의 연대기와는 맞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진화에 관해서도, 하나님이 진화의 과정을 통해 일하셨다고 보는 그리스도인과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나뉩니다.
이 모든 견해가 함께 붙드는 것이 있습니다. 세계는 하나님이 지으셨고, 선하며,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고, 창세기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점입니다. 의견이 갈리는 부분에서는 서로를 신앙 없는 사람으로 몰아붙이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한 가지 더 정직하게 말하면, 갈릴레오 사건에는 여러 원인이 얽혀 있지만 교회 지도자들이 당시의 우주관을 성경 자체의 가르침과 혼동한 것도 그 하나였습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와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해석하는지를 구별하는 일은 지금도 필요합니다.
"과학은 자연법칙을 알려 주므로 기적은 불가능하다." 이 반론의 가장 강한 모습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아는 경험은 언제나 죽은 사람이 살아나지 않는다고 말해 주는데, 그 반대의 보고를 믿는 것보다 그 보고가 잘못되었다고 믿는 편이 합리적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진지하게 대할 가치가 있습니다. 증거 없이 기적을 믿는 것은 정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논증의 힘은 우리가 무엇을 처음부터 그럴듯하다고 여기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거나 결코 일하지 않으신다면 기적에 대한 보고는 언제나 받아들여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질문은 열려 있고, 각 주장은 그 증거로 따져야 합니다. 성경에서 자연의 규칙은 하나님을 가두는 감옥이 아니라, 하나님이 날마다 신실하게 지키시는 약속입니다 (렘 33:25). 바울은 "또 그분께서는 모든 것보다 먼저 계시고 모든 것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존재하느니라."고 말합니다 (골 1:17). 자연법칙은 하나님이 평소에 일하시는 방식을 서술하고, 기적은 하나님이 평소와 다르게 일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기적이 불가능하다고 미리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기적 이야기를 믿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부활에 관해서는 예수는 정말 부활했는가?에서 이를 다룹니다.
더 생각해 보기
성경과 자연이라는 두 책에 대해 오랜 전통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연이라는 책과 성경이라는 책을 모두 쓰신 분이므로, 둘 다 참되게 읽는다면 서로 부딪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읽는 방법이 틀릴 수는 있어도, 하나님의 두 책이 서로 어긋나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모든 어려움을 없애 주지는 않지만, 질문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줍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습니다. 내가 신앙과 과학을 충돌한다고 느끼는 것은 어떤 구체적인 질문 때문입니까? 그것은 성경 자체의 문제입니까, 아니면 내가 들어 온 성경 읽기 방식의 문제입니까? 별이 가득한 밤하늘을 보고 시편 기자처럼 "사람이 무엇이관대"라고 물어 본 적이 있습니까?
더 읽으려면 하나님은 존재하는가?, 성경은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보십시오.
관련 질문
- 하나님은 존재하는가?성경은 하나님의 존재를 논증으로 증명하려 하지 않고, 창조 세계와 사람의 양심이 그분을 가리킨다고 말합니다. 세계의 존재와 질서, 우리 안의 도덕 감각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이정표이지 수학 같은 증명은 아닙니다. 그래서 신앙은 증거 없는 도약이 아니라, 찾는 사람에게 만나 주시겠다는 약속을 신뢰하며 계속 찾는 일입니다.
- 성경은 믿을 만한가?성경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말씀이며 목격자들의 증언에 기초한 책이라고 소개합니다. 필사본의 수와 이른 시기, 사해 사본 같은 발견은 오늘의 성경이 기록 당시의 본문을 매우 가깝게 전한다고 믿을 근거를 줍니다. 이것은 증명이 아니라 신뢰할 이유이며, 정직한 의문은 그 신뢰를 시험하는 일이 됩니다.
- 성경은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하나의 이야기로 읽을 때 가장 잘 읽힙니다. 문맥과 문학 양식을 살피고, 묵상하고 순종하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교회와 함께 읽으십시오. 해석이 다양하다는 사실은 읽기를 포기할 이유가 아니라 더 겸손하고 성실하게 읽어야 할 이유입니다.
- 믿음이란 무엇인가?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눈을 감고 어둠 속으로 뛰어드는 일이 아니라, 신실하신 분을 신뢰하고 그분께 자신을 맡기는 일입니다. 그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에서 나고, 선한 삶으로 열매를 맺으며, 의심 속에서도 도움을 구하는 마음으로 이어집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믿음 자체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향하는 분, 곧 그리스도께 구원이 있다고 고백해 왔습니다.
관련 주제
출처
- 니케아·콘스탄티노플 공의회, 니케아 신경 325/381 — 동서방 교회가 함께 고백하는 신조. 읽기
성경과 고전 주석을 바탕으로, 역사적 기독교 신앙(사도신경, 니케아 신경)의 관점에서 쓴 글입니다. 그리스도인 사이에 견해가 갈리는 문제는 여러 견해를 함께 소개합니다. 성경 인용: 개역한글.